서울 명동의 유네스코회관 건물. 명동 사채시장의 상징적인 건물로 과거에 사채 사무실이 많이 입주해 있었다. 사진은 기사내 특정 사실과 관계없음.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일요신문>에서는 거대하게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 불길을 잡지 못하고 있는 불법 사채시장의 실체를 해부해 보기로 했다. 그 첫 시리즈로 사채시장의 핵심인 ‘전주’(錢主)들과 그들이 채무자에게 강요하는 각종 ‘담보’에 대해 깊숙이 들여다봤다.
사채시장의 메카는 역시 ‘명동’이다. 명동 사채시장은 1950년대부터 서민과 자영업자를 상대로 돈을 융통할 정도로 역사가 깊다. 당시 명동 사채시장은 주로 고리대금업자, 전당포 등이 주도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경제개발 붐이 일며 기업들의 자금 수요가 늘자 명동 사채시장의 전성기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이즈음부터 명동 사채시장은 개인을 상대로 돈을 대출하는 방식보다는 주로 기업을 상대하며 어음을 할인해주는 거대 사채 시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부터 ‘사채시장의 큰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전주’로 불리는 ‘큰손’들이 주로 모였던 장소는 서울 명동 세종호텔과 로열호텔 주변 몇몇 다방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정부의 금융 정책을 논하며 지하에서 하루에 수십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움직였다고 한다. 1980년대 들어 사채시장 규모가 급격히 커지자 명동 유네스코 빌딩에 업자들의 사무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인근의 계양빌딩, 센트럴빌딩 등 명동에 위치한 큰 빌딩에는 어김없이 사채업자들이 2~3평 남짓한 사무실을 차려놓고 자금이 절실한 기업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동의 환전상 입간판으로 환전상들이 사채업을 겸하기도 한다. 사진은 기사내 특정 사실과 관계없음.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그렇다면 현재는 어떨까. 명동 사채업자들에 따르면 “큰손은 이제 옛말”이라며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 2009년 명동 사채시장에 입문한 A 씨는 “일부 언론에서 얘기한 ‘감춰진 사채시장 큰손 4인방’ 등의 얘기들은 허구가 많아 보인다”라며 “물론 큰손이 없지는 않겠지만 사채시장이 예전만 못하고 보통 전주들은 직접 나서는 법이 없기 때문에 큰손의 신분이 드러날 일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전주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행한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다. 또 다른 명동 사채업자 B 씨는 “20년 동안 알고 지낸 전주의 비서가 20억 원을 빼돌려 미국으로 도망간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해당 전주는 고소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돈의 출처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신분 노출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앞서의 사채업자 A 씨에 따르면 명동의 사채시장은 크게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돈을 가진 전주’, ‘전주가 고용한 집사(3~4명)’, ‘전주의 돈을 굴리는 사채업자’, ‘사채업자를 보조하는 영업사원’ 등이다. 특히 대형 전주의 경우 신분을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다음 단계인 집사들을 고용해 사채업자를 접촉하게 한다. 집사를 통해 전주의 자금을 받은 사채업자는 어음을 할인해줄 적합할 기업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때 활약하는 사람이 사채업자가 고용한 영업사원들이다. 영업사원들은 직접 기업을 돌며 “어음할인하세요”라고 광고를 한다. 이후 어음을 사채업자에게 몰고 오면 사채업자는 몇 프로의 수수료를 영업사원에게 떼어 주는 식이다. A 씨는 “이곳 명동 사무실은 소위 ‘중간집’이다. 사채업자들이 중간집을 운영하는 셈”이라고 전했다.
사채업자 사이에서 전주는 흔히 ‘투자자’로 통한다. 사채업자를 통해 돈을 불리지만 결국 자본을 투자해서 수익을 얻는 것은 일반 투자자나 똑같다는 뜻이다. 때문에 1억 원가량의 자산을 갖고 전주의 세계에 뛰어드는 ‘생계형 전주’도 늘어난다는 게 사채업자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생계형 전주의 말로는 대부분 비극으로 끝난다고 전해진다.
서울 역삼동의 한 캐피탈 업체. ‘캐피탈’ 등의 간판을 단 곳들은 대개 사채를 취급한다고.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생계형 전주뿐만 아니라 ‘순진한 전주’도 존재한다. A 씨는 “사채업자들이 만만한 전주를 찾아서 후려치는 경우도 은근히 있다”며 “한 기업을 눈독들이다가 자금이 필요하다 싶으면 만만한 전주를 찾아가 ‘1.5% 이자를 떼 주겠다. 자금을 지원해 달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사채업자는 3%를 먹고 입을 닦는다”라고 귀띔했다.
무엇보다 압권은 ‘공무원’이 전주를 하는 경우. 사채업자 A 씨가 증언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직접 만났던 전주였는데, 지방 검찰청에서 근무할 때 압류품 등을 엄청나게 빼내 비자금으로 빼돌렸다고 한다. 이후 몇몇 친한 직원들과 공모해 차명으로 계좌를 돌려놓고 사채업으로 계속 돈을 불렸다”며 “돈을 빼돌렸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그 전주는 정년퇴직까지 엄청나게 성실하게 근무를 했다고 한다”라고 전했다. A 씨는 “그 사람이 2년 전에 사망했는데 빈소 분위기가 굉장히 을씨년스러웠다고 한다. 전주의 아들이 아버지의 자산이나 의혹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을 안 불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렇듯 여러 종류의 전주가 현재도 존재하지만, 최근의 명동 사채시장은 대형 전주들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위상도 예전만 못하다는 게 사채업자들의 중론이다. 이를 대표하는 현상이 명동 사채 사무실이 하나둘 문을 닫는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기자가 명동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채 사무실을 찾았지만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A 씨는 “간판을 걸어두지 않고 운영하는 사채 사무실이 대부분이지만 실제로 빈 사무실이 늘어가고 있다. 전반적으로 침체기”라고 전했다.
명동 사채시장이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사채업은 강남, 여의도 등으로 살 길을 찾아가고 있다. 강남에는 각종 코스닥 기업 및 벤처기업, 여의도에는 증권가가 자리 잡고 있기에 사채업이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게 사채업자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여전히 명동 사채시장이 사채업의 본원이라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사채업자 A 씨는 “2000년대 초반 벤처붐이 꺼지면서 강남 사채시장도 굉장히 흔들렸다”며 “당시 강남으로 이주했던 명동 사채업자들은 다시 명동으로 돌아와 사채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험악한 인상? 오해야 오해
드라마 <쩐의 전쟁>의 한 장면.
복덕방 아저씨 스타일이지만 돈에 있어선 지독하게 철저한 게 명동 사채업자의 특성이다. “돈이 안 되면 안 한다”라는 게 생활에 배어 있다는 것. 웬만한 기업 관계자들은 몇 백 장의 사업계획서를 들고 와도 문전박대를 당하기 십상인 게 명동 사채업자들의 특성이다. 철저하게 신뢰할 수 있는 단골 거래를 하는 습성 때문이다.
명동 사채업자의 평균 수익은 하루에 300만 원 정도인 것으로 전해진다. A 씨는 “한 사채업자는 지난주에 하루 2400만 원을 벌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하루 평균 200만 원에서 300만 원 이상 못 벌면 명동에서 문을 닫아야 하는 게 상식”이라고 귀띔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명동 현금왕 단사천 박현주 키운 백희엽
고 백희엽 씨는 사채와 증권시장의 대모였다. 1992년 일요신문 창간호에 보도된 백 씨.
이 회장과 더불어 1960~1970년대 국내 사채시장을 주물렀던 인물로는 단사천 전 해성그룹 회장(2001년 사망)을 빼놓을 수 없다. 황해도 해주 출신이었던 단 회장은 18세의 나이에 홀로 월남한 뒤 재봉틀 조립사업으로 종자돈을 마련해 사채시장에서 재산을 불렸다. 1980년대 하루 현금 동원 능력이 3000억 원 규모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현금왕’이라는 별명도 당시 명동 사채시장에서 가장 현금동원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얻은 것이다. 지금까지도 명동 사채시장에서는 “재벌 중에서 단 회장의 돈을 안 빌려 쓴 곳이 없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본명보다 ‘광화문 곰’으로 널리 알려진 고성일 씨(1999년 사망)도 1980년대 증권가를 주름잡았던 ‘큰손’이다. 고 씨는 6·25 직후 염료사업을 통해 번 돈으로 서울 광화문, 남대문시장, 여의도, 강남 등지의 땅을 대거 사들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들인 땅은 모조리 노른자위 땅이 되면서 7000억 원이라는 큰돈을 고 씨에게 안겨줬다. 이후 고 씨는 주식투자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1978년 건설주 파동으로 큰 손실을 본 데 이어 1980년대 말에도 증권주에 집중투자 했다가 큰 실패를 겪고 거의 전 재산을 잃었다.
사채시장의 대부가 이상순 회장이었다면 대모는 단연 백희엽 여사(1995년 사망)였다. 백 여사는 6·25 직후 군복 등 의류사업을 통해 큰돈을 벌어 1960년대 본격적으로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우량주를 사서 무기한 묻어둔 뒤 주가가 오르면 파는 정석 투자방식으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는데 백 여사만의 특유의 배짱이 성공의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 박현주 미래에셋증권 회장이 대학원 시절 백 여사로부터 주식투자를 배웠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희대의 사기꾼’으로 불리는 장영자 씨는 여전히 의문의 사채업자로 남아있다. 지난 1982년 단군 이래 최대의 어음 사기사건이라 불리는 ‘6400억대 어음사기’의 장본인인 장 씨는 지금까지도 재산 형성 과정이 의문투성이다. 다만 장 씨가 자금사정이 어려운 기업에 접근해 유리한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면서 그 금액의 2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시중에서 할인을 받는 수법을 사용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