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국내 골프인들은 지난 5월 20일(한국시간) 배상문(캘러웨이)이 HP 바이런넬슨 챔피언십에서 마침내 미 PGA 첫 우승을 달성하자 이렇게들 반응했다. 만 27세이지만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 상금왕에 오른 ‘검증된 한국산 명품’이었기 때문이다. 빼어난 기량에 훤칠한 외모. 여기에 ‘배모삼천지교’라는 신조어를 만든 홀어머니의 뒷바라지까지. 이미 배상문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선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몇 가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배상문의 소소한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이런 ‘미장센(mise en scene)’은 알면 알수록 배상문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 배모삼천지교의 속살
PGA 투어에서 배상문이 한국인 챔피언이 되기까지는 그를 뒷바라지한 ‘열혈 마미’ 시옥희 씨의 공이 크다. 사진은 2007년 5월 SK텔레콤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배상문과 그의 캐디를 맡은 시옥희 씨. 연합뉴스
배상문이 이번에 우승할 때 시옥희 씨는 해인사 홍제암에서 불공을 드렸다. 그리고 배상문도 부처님 오신 날(5월 17일)에 경기를 해 우승한 것이니 배상문과 집안의 깊은 불심과는 묘할 정도로 인연이 깊다. 어쨌든 배상문은 평범치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시옥희 씨나 배상문 모두 극성 골프대디와 골프마미들이 판치는 국내 골프계에서 성공하기까지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제법 고단했다. 반지를 팔아 전지훈련비에 보탰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시옥희 씨는 ‘열혈 골프마미’로도 유명하다. 여러 일화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2010년 대회 도중 아들의 동반자에게 목청을 높였다가 한국프로골프협회로부터 1년간 골프 코스 출입정지를 당한 일이다. 주변에 따르면 당시 얼굴 전체를 가리고 눈만 내놓은 채로 몰래 아들의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보기도 했다고 한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배상문에게 심한 질타를 해 여러 차례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직접 캐디백을 메는 등 배상문의 골프에 인생을 올인한 홀어머니의 정성은 이제 미담이 됐다.
이런 모든 과정을 직접 겪은 배상문은 “지금의 저를 키운 것은 8할이 어머니 덕”이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는 반항도 했지만 아직도 일체의 돈관리를 어머니에게 맡길 정도로 어머니를 삶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 만들어진 효자인 것이다.
# 알고 보면 ‘잡초류’
어머니의 권유로 8살 때 골프에 입문한 배상문은 김경태, 김비오 등 한국을 대표하는 차세대 영건들과는 좀 다르다. 보통 프로 유망주들은 아마추어에서 최고의 선수로 활약한다. 그런데 배상문은 주니어 시절만 해도 국가대표 상비군에 들지 못한 평범한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워낙에 조기교육 열풍이 강한 국내 골프계에서 주니어 시절 두각을 나타내지 않고, 프로무대에서 갑자기 성공하는 것은 남녀를 통틀어 아주 드문 일이다.
KPGA 사무국의 한 관계자는 “(배상문과 같은 성공 케이스는) 아주 드문 일이다. 주니어 시절 성적을 내고, 상비군 등에 들지 않으면 훈련 여건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배상문이 미국에서도 인정하는 명품스윙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분석했다.
배상문의 프로성적은 두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큰 대회에서 강하다는 것과 2년차의 사나이라는 사실이다. 2005년 프로에 데뷔한 배상문은 2006년 11월 에머슨퍼시픽오픈부터 우승컵을 수확해 2010년까지 7승을 거뒀다(2008, 2009년 상금왕). 그런데 7승 중 5승이 메이저대회였다. 골프로 먹고 살아야 했기에 프로전향도 빨랐고, 경기력도 상금이 많은 대회에 집중됐다고 할 수 있다.
2년차에 강한 것도 배상문의 특징이다. 한국, 일본, 미국 모두 2년차에 첫 우승을 일궜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총 3승, 2011년 상금왕)에서는 첫 승 이후 단번에 투어 최고의 선수로 올라섰다.
# 연예인 뺨치는 호남쾌걸
PGA 투어 바이런 넬슨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배상문이 트로피에 입을 맞추고 있다. AP/연합뉴스
“나무냄새 좋죠?(판교 자신의 집 지하에서 촬영 중) 이거 유명한 일본 원목이에요. 여기다가 일본에서 번 엔화 다 발랐어요. 집에 오면 나무냄새가 나고 너무 좋더라고요. 그런데 1년에 여기 며칠 못 있어요. 완공된 후 바로 미국 진출했잖아요. 하하.”
“타이거 우즈와 동반 라운딩을 하는데 정말 감동받았어요. 정말이지 퍼팅 등 쇼트게임은 그 수준이 달랐어요. 그런데 드라이버는 뭐 별로였어요. 제가 좀 가르쳐 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전 술, 담배, 결혼은 멀리합니다. 여자친구요? 그건 좀 덜 멀리하죠(웃음). 타이거한테 여자친구 한 명 소개받을까요? 여자 많잖아요? 여자친구는 무조건 예뻐야 하는데 타이거가 예쁜 여자 많이 알 것 같아요.”
올 초 한 골프전문 인터넷방송에 출연한 배상문은 연예인 못지않은 토크감각을 뽐냈다. 어떤 질문이든 농담을 섞어가며 유쾌하게 답했다. 물론 이렇게 즐거운 가운데서도 2012년 미국 루키생활 중 겪은 좌절과 혼자 호텔방 천장을 보면 눈물을 지었던 일 등도 진솔하게 표현했다.
배상문은 자신의 인생을 골프에 비유하면 이제 고작 ‘1번 홀 그린’이라고 했다. 미PGA에서는 30대 초중반은 돼야 전성기이고, 50살 가까이도 절정의 기량을 보이니 그럴 법도 하다. “대한민국 골프가 얼마나 발전할지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괜한 것이 아닌 듯싶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