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규가 끼얹은 물에 인터뷰하던 정인영 아나운서까지 흠뻑 젖었다. 정인영 아나운서는 지난 시즌에도 임찬규에게 물벼락을 맞은 바 있다(오른쪽 아래). 사진출처=KBS N 스포츠 방송 캡처
“내 그럴 줄 알았다. 한 번은 꼭 터질 것 같더니만….”
5월 27일 모 구단 선수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연방 혀를 찼다. 그가 보던 뉴스는 임찬규의 ‘물벼락 세리머니’ 관련 기사였다.
전날 임찬규는 잠실구장에서 열린 ‘SK-LG’ 경기 직후 MVP로 뽑힌 선배 정의윤의 방송사 인터뷰 때 양동이에 물을 담아 얼굴을 향해 뿌리는 장난을 쳤다. 끝내기 안타로 팀을 살린 선배 정의윤을 향한 축하의 세리머니였지만, 옆에 있던 정인영 KBS N SPORTS 아나운서까지 물벼락을 맞으며 인터뷰는 잠시 중단됐다.
선수들의 물벼락 세리머니는 이전에도 심심찮게 있었기에 임찬규는 이 사건의 여파를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누리꾼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수의 누리꾼은 임찬규가 지난해에도 똑같은 물벼락 세리머리를 했던 걸 떠올리며 “어떻게 이런 짓을 두 번이나 할 수 있느냐”고 맹비난했다.
이날 경기 중계를 담당했던 KBS N SPORTS 관계자들도 발끈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회사 관계자는 “한국야구위원회(KBO)와 LG 구단에 ‘물벼락 세리머니’를 중단해 줄 것을 수차례 요구했으며 대안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번번이 우리의 목소리가 수용되지 않았다”며 “결국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물벼락 세리머니로 우리 회사 아나운서가 흠뻑 물에 젖어야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특히나 이 관계자는 “앞으로 우리 회사는 경기 후, LG 선수 인터뷰를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방송사의 예상치 못한 거센 반발에 LG와 임찬규는 고갤 숙이며 사과했다. LG 관계자는 “선수들에게 ‘앞으로 과도한 세리머니는 절대 금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며 “임찬규도 깊이 반성하는 만큼 정 아나운서와 방송사에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한다”고 머릴 조아렸다.
사실 야구계의 세리머니가 처음부터 여론의 지탄을 받은 건 아니었다. 2000년대 중반만 해도 별다른 세리머니가 없었다. 결승타를 친 선수를 쫓아가 부둥켜안거나 등에 올라타는 게 전부였다.
양준혁 SBS 해설위원은 “승리 팀의 과도한 세리머니가 상대 팀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와 어찌됐건 상대 팀도 동업자란 생각 때문에 2000년대 중반까진 물을 뿌리거나 얼음물을 쏟아 붓는 세리머니는 없었다”며 “기억하기로 2008년부터 선수들 사이에서 생수병이나 이온음료병을 쏟아 붓는 세리머니가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다른 선수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2008년부터 물병 세리머니가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 선수는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면 승리 선수 인터뷰를 할 때 동료 선수들이 몰래 다가와 이온음료수를 머리에 뿌리더라”며 “그 장면을 누군가 보고 처음 시도하고, 반응이 좋으니까 다른 선수들이 따라한 게 아닌가 싶다”고 추측했다.
사진제공=LG 트윈스
야구계에선 “상대 팀 자극은 물론이려니와 지나친 세리머니는 팬들의 눈살까지 찌푸리게 할 수 있다”며 자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나 자칫 부상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었다. 실제로 2011년 두산 모 선수는 결승타를 치고 홈을 밟을 때 동료 선수들의 과도한 세리머니로 목 부상을 당해 다음날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선수들은 과도한 세리머니가 어떤 반작용을 불러올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물벼락 세리머니를 하는데 왜 우리만 눈치를 봐야 하느냐”는 게 이유였다.
선수들의 말대로 메이저리그에서도 물벼락 세리머니가 있다. 한국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약하지 않다.
수훈 선수 인터뷰 도중 동료 선수들이 물을 끼얹는 일이 다반사고, 아예 호스로 물을 뿌리는 일도 있다. 한창 인터뷰가 진행할 때 크림파이를 얼굴에 비비는 건 생경한 장면도 아니다. 메이저리거들의 세리머니 때문에 아나운서와 카메라맨이 엉뚱한 피해를 입는 것도 우리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선 ‘과도한 세리머니 운운’하는 일은 별로 없다. 되레 방송 관계자들은 선수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눈다. 그러나 이면엔 한국과 다른 중계시스템이 있다.
한 방송사 PD는 그 차이를 다음과 설명했다. “미국은 메이저리그 대부분 경기를 지역방송사가 담당한다. 당연히 지역방송사는 연고지 팀과 하나라는 생각이 강하기에 연고지 팀 선수들의 과도한 세리머니에도 함께 즐거워한다. 하지만, 한국은 대개 케이블스포츠채널이 프로야구 중계를 담당하고, 이 방송사들은 모두 전국구 채널이다. 특정팀의 세리머니에 함께 기뻐할 이유가 없다. 만약 전국 채널에서 메이저리그 중계를 하는데 물을 뿌리고 난리를 쳤다면 미국 방송사도 가만 있지 않을 거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과도한 물벼락 세리머니를 했다면 야구인들의 집중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야구계에서 그라운드는 신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물병은 고사하고, 물이 그라운드에 튀기는 것도 용납하지 못한다. 수훈 선수 인터뷰 땐 선수와 팬과의 소중한 만남이라 생각해 다른 선수들은 아예 라커룸으로 들어가 버린다.
젊은 선수들은 물벼락 세리머니 논란이 내심 반가운 눈치다. 입단 3년 차의 모 선수는 “그동안 물벼락 세리머니나 빈볼은 나처럼 막내급 선수들이 행동대원으로 나서게 마련이었다. 선배들이 시키는데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욕 먹을 게 뻔해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다”며 “이참에 물벼락 세리머니나 빈볼이 사라져 우리 같은 막내급 선수들이 더는 불필요한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