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국 씨(오른쪽)가 1990년 설립한 시공사는 공격적 사업확장을 통해 ‘빛의 속도’로 성장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뉴스타파>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전재국 씨는 지난 2004년 7월 싱가포르의 한 법무법인을 통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블루 아도니스’라는 유령회사를 설립했다. 서류상의 주소지가 현재 전 씨가 경영하고 있는 출판사 ‘시공사’의 주소와 일치해 전 씨의 소유임이 밝혀졌다. 물론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는 것만으로는 불법혐의가 성립되지 않으나 미심쩍은 부분이 하나씩 터져 나오면서 문제가 커졌다.
우선 전 씨가 이 회사와 연계해 아랍은행 싱가포르지점에 개설한 계좌가 도마 위에 올랐다. 6일 <뉴스타파>가 추가로 제시한 전 씨의 서류상 회사 이사회 결의서 자료에 따르면 회계 장부와 주주 명부 등 내부 자료를 아랍은행 싱가포르 지점에 보관한다는 결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영문 약자 ‘C/O(Care of)’는 단순히 서류 보관이 아닌 행정과 회계업무 전반을 관리하는 것으로 고액 계좌에만 해당되는 특별 서비스라는 게 <뉴스타파>의 설명이다.
또한 아랍은행 싱가포르 지점은 전 세계 부자를 상대로 자산관리를 하는 은행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앞서 전 씨는 “유학생활 후 남은 돈 관리를 위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고 해명했으나 상당한 자금거래가 있었음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게다가 전 씨의 해명과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2004년이라는 시간도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전 씨는 1989년 미국 유학생활을 중단하고 귀국했는데 왜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굳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남은 자금을 관리해야 했었는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2004년은 ‘우연히’도 전두환 비자금 사건이 불거지며 동생 재용 씨가 구속되는 등 한창 전 씨 일가가 시끄러울 무렵이었다.
당시 전 씨는 국내에서 출판사 ‘시공사’를 운영하며 나름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시공사는 1990년, 전 씨가 32세의 나이로 친구들과 공동투자 형식으로 설립한 회사다. 그때 전 씨는 단돈 ‘1000만 원’을 자본금으로 내놓았는데 그 돈마저도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전 씨는 시공사를 설립하기 직전까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등 일절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공식적’으론 여동생 효선 씨처럼 아버지 전두환으로부터 수십억 대의 용돈을 받지도 않았기에 대체 목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전 씨가 사업 시드머니로 투자했던 1000만 원이 아버지 전두환의 쌈짓돈(비자금)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두환 비자금의 거대한 저수지가 그 일가의 사업 전체에 중요한 ‘용수’가 되었다는 의미다.
전재국 씨(왼쪽)와 전두환 전 대통령. 일요신문 DB
어쨌든 전 씨의 1000만 원이 투자된 시공사는 빛의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시공사는 보통의 대형 출판사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왔다고 평가받고 있다. 대체로 출판사는 작은 규모로 시작해 몸집을 키워가는 반면 시공사는 시작부터 먹성 좋은 잡식성 공룡이었다고 한다.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출판업계에 진입, 해외에서 무차별적으로 판권을 사들이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업영역을 확장해나갔기 때문이다.
사업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전 씨는 무협지, 판타지, 인문서적, 문화전문서적, 불교서적, 어린이서적, 매거진 등 출판의 전 장르를 섭렵했고 기업인수합병도 마다하지 않았다. 교육콘텐츠기업 ‘뫼비우스’와 온·오프라인 서점 ‘리브로(2010년 온라인 영역은 매각)’, 도서도매 물류기업 ‘북플러스’까지 모조리 사들였다. 덕분에 시공사의 계열사도 시공북스, 시공아트페이스, 시공코믹스, 시공매거진스, 시공갤러리, 시공아카데미 등 10여 개에 이른다.
몸집이 커질수록 전 씨뿐 아니라 일가의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친구들과 공동투자 형식으로 시공사를 설립했으나 현재 전 씨를 포함한 일가가 상당수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공시에 따르면 전 씨의 지분은 50.53%에 이르며 그의 형제들인 효선, 재용, 재만 씨와 부인 정도경 씨의 지분까지 합하면 71%에 달해 가족기업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참고로 지난해 시공사의 매출은 421억 원으로 영업이익도 30억 900만 원에 달한다.
여기에 전 씨는 출판뿐 아니라 통신판매 서비스, 광고, 전시이벤트 등의 분야에도 진출해 사업가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게임업체인 ‘파프리카미디어’를 비롯해 광고회사 ‘디노커뮤니케이션’, 디지털기기 정보 사이트 ‘케이벤치’, 대규모 정원 휴양지 ‘허브빌리지’, 여행서적전문업체 ‘저스트고’가 있다.
이처럼 승승장구한 덕분에 전 씨는 불과 20여 년 만에 600억 원대의 자산을 보유한 ‘재벌’이 됐다. 앞서 언급했듯 그 과정에서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이를 통해 싱가포르로 자금을 이동시키기도 했다. 전 씨는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했고 아버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밝혔지만 국민들은 이에 흔쾌히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 검찰도 전 씨의 페이퍼컴퍼니에 전두환의 비자금이 포함됐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만큼 그 결과가 주목된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3년마다 찔끔찔끔’ 징하다 징해!
199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법원으로부터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진납부는 남의 일이라 여기고 있다. 추징시효가 다가오면 그제야 찔끔찔끔 납부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강제집행도 원활히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1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으나 검찰이 나서 받아낸 금액은 불과 532억여 원. 미납 추징금은 무려 1672억 원에 달해 추징률은 24%에 그치고 있다.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 추징률은 90%를 상회하고 있다. 추징금 2628억 원 가운데 231억 원만 남아 있다.
검찰의 전두환 추징금에 대한 첫 강제집행 성과는 꽤 훌륭했다. 추징 선고 직후 검찰은 188억 원 상당의 무기명채권을 현금화해 추징했고 그해 10월에는 예금 및 현금 124억여 원을 추징하는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그게 끝이었다.
시간은 흘러갔고 3년의 추징만료기한인 2000년이 되자 검찰의 마음이 바빠졌다. 단돈 1원이라도 추징을 해야 시효가 연장되기 때문에 꼭 성과가 필요했다. 결국 검찰은 그해 10월 전두환의 1987년식 벤츠 승용차를 강제 집행했다. 두 달 뒤에는 전 전 대통령의 아들 재국 씨의 명의로 된 용평콘도 회원권을 추징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바탕 추징 바람이 지나가고 또 다시 3년이 흘렀다. 검찰은 실적이 부진하자 2003년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을 공개해달라며 재산명시신청을 법원에 냈다. 이때 그 유명한 ‘전 재산 29만 원’의 전설이 탄생했는데 그해 4월 추징과 관련한 재판에 출석한 전두환은 29만 1000원이 찍힌 통장을 제출하며 “이것이 내 전 재산”이라고 말해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하지만 이듬해 ‘전두환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거액의 추징금을 환수할 수 있었다. 2004년 2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전 전 대통령의 차남 재용 씨를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부인 이순자 씨와 처남 이창석 등이 보유하고 있던 수백억 원대의 ‘괴자금’도 발견됐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167억 원을 차명으로 관리하면서 71억여 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였다. 당시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던 이순자 씨는 “알토란같은 내 돈”이라며 눈물로 항변하다 결국 추징금 대납 형식으로 130억 원을 내놓는 등 총 200억 원을 추가로 징수했다.
2006년에는 전두환이 30년 전에 매입해 숨겨 놓았던 서울 서초동 땅을 찾아 1억 9000만여 원을, 2008년에는 은행 채권추심을 통해 4만 7000원을 추징하는 등 미미한 금액의 강제 집행이 이뤄졌다.
그러다 2010년 10월 전두환이 돌연 강연을 통한 소득이 생겼다며 추징금 300만 원을 납부했다. 추징집행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검찰이 강제 집행에 나서기 전 추징 시효를 늘리기 위해 스스로 소액을 낸 것이었다. 덕분에 추징 시효는 2013년 10월로 연장됐고 현재까지 추가 집행은 되지 않았다.
이에 검찰은 서울중앙지검에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추적전담팀(팀장 김민형 검사)을 구성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서울중앙지검의 팀장검사와 수사관 7명으로 구성된 추징팀은 “신발 한 짝이라도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며 열의를 보이고 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해고 언론인 참여 독립언론 매체
탐사심층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뉴스타파>가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을 보도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11년 11월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의 프로젝트로 시작된 인터넷 독립 언론 <뉴스타파>는 당시 전·현직 언론인의 뜻을 모아 탄생했다. MBC에서 해고당했던 이근행 PD와 노종면 전 YTN 기자, 변상욱 CBS 대기자 등이 참여했으며 성공회대 신영복 석좌교수가 제호를 만들어줬다.
지난해 1월 첫 방송으로 ‘10·26 재보궐선거 투표소 변경의혹’을 보도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뉴스타파>는 연이어 제주 강정마을, 4대강의 진실 등을 통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후 일부 언론인들이 기존의 소속사로 돌아가면서 시즌1이 종료됐다.
시즌2부터는 새로운 제작진 참여와 함께 회원을 모집해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시즌2의 막이 오르고 3300여 명의 회원들 후원으로 카메라 등 방송장비도 갖춰졌다.
38회 방송으로 시즌2를 마감한 <뉴스타파>는 또 한 번의 변신을 꾀했다. 시즌3을 준비하며 한국형 프로퍼블리카(Propublica:광고를 받지 않으며 오로지 후원으로만 운영되는 언론매체)를 표방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로 출범했다. 데스크 겸 대표에는 김용진 전 KBS 탐사보도팀장이, 앵커는 최승호 전 MBC PD가 자리했다. 이 덕분에 국제탐사보도협회와 함께 이번 ‘조세피난처 한국인 명단’에 대해서도 보도할 수 있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