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야구뿐일까. 사람을 아끼지 않고, 실적이 미미하면 폐기처분하는 사회에서는 내가 나를 아껴야 한다. 평생 친구로 나를 버텨주는 내 몸을 연인처럼 아껴야 한다. 사회가 나를, 내 몸을 아껴주지 않으니까. 일등만 기억하는 현대사회에서 ‘나’는 그저 돈 버는 기계가 되어 있다.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이유도 모르는 무한경쟁의 감옥의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돈 버는 기계가 되어 있는 세상에서 내 스스로 내 공간을 찾고 내 시간을 찾아 피곤하면 쉬어야 하고 울고 싶으면 울어야 한다. 아플 자유, 울 자유 없는 세상에서 돈이 많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나. 의혹이라는 놈이 찾아와 분노의 불을 지피며 당신을 고통의 화택(火宅)으로 만들 때, 물이 끓듯 화가 끓고, 기름이 끓듯 속이 들끓을 때 어떻게 하나. 불편하고 역겨운 사람과 상황을 그저 꾹, 참고 견디는가, 아니면 정의의 이름으로 맞서 싸우는가.
나는 혼자만의 공간으로, 나만의 동굴로, 침묵으로 도망간다.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때는 만나면 만날수록 오해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불신만 부풀어 오른다.
만나서 풀리지 않을 때, 만날수록 얽히기만 할 때는 ‘대범’을 가장하고 만나는 것보다는 그릇의 작음을 인정하고 도망가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대와 평판으로부터, 윤리와 의무로부터, 사람과 소문으로부터, 심지어 사랑으로부터도. 완전히 혼자가 되어 마침내 내가 나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도달할 때까지.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그 시간이야말로 신 앞에 단독자로 서있는 시간이다.
올해는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키르케고르를 실존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보편타당하게 이해되는 진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나’의 진리를 찾아 나선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보다 나를 구원하는 일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 믿은 그에게는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인연이 있었고, 온 세상이 비웃는다 해도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가 있었다. 그는 사상가보다는 기도하는 인간을 사랑했고, 잘나가는 인간보다는 성찰하고 참회하는 중에 심지가 생긴 인간을 사랑했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신 앞에 선 단독자의 표상으로 보았다. 신이 명하자 아브라함은 이유도 모른 채 늦게 얻은 귀한 아들 이삭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려 한다. 세상에, 어찌하여 키르케고르는 신의 제단에 아들을 바치러 가는 이상한 아브라함에 매료되었던 걸까?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에게서 실존적 고뇌의 정수를 보았다. 상식으로도, 이성으로도, 사랑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스스로를 제물로 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생의 진실 말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한다. 성숙의 내면성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처럼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고독한 사태를 경험하며 성장한다. 자기만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삶의 고유성이 생기는 경우는 없으니까.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