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김현철 교수님’이란 호칭이 더 익숙하겠다.
“어제 한양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감회가 무척 새로웠다. 9월부터는 ‘세계화와 국가경영’을 주제로 정식 강의도 시작된다.”
― 학생들이 많이 알아보던가.
“마침 학과장이 나에 관해 미리 소개를 안 했다길래 얼굴만 보고 얼마나 알아볼까 싶어 ‘나를 아는 학생 있으면 손 들어보라’ 했더니 진짜 별로 없더라. 그도 그럴 것이 대다수가 1991~1992년생들이다. 우리 둘째아들과 막내딸 사이니 모를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다고 들었다. 현재 건강 상태는 어떤가.
“4월 5일 입원하셨으니 딱 두 달째다. 단순 감기가 갑자기 급성폐렴이 되면서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 한 달간 치료를 받았다. 솔직히 위험한 고비들이 있어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워낙 의지가 강하시고 평소 건강관리를 열심히 한 덕분에 다행히 많이 회복됐다. 지금은 체력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하고 계신다.”
― 최근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논란이 새삼 불거졌다. 특히 올해는 YS가 5·18 민주화 요구 단식 투쟁을 한 지 꼭 30년 되는 해였다.
“5·18이 폭동에서 정식 민주화운동으로 격상됐던 것이 문민정부 때다. 1995년에는 5·18 특별법까지 제정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기도 했다. 보수 정권이 들어섰다지만 살아있는 역사를 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일부 언론에서는 북한 개입설까지 주장하며 역사를 유린했는데, 일제강점기 만행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와 다를 바 없는 왜곡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공식행사를 찾으면서 좀 누그러들었다.
“그렇긴 했어도 행사 때 박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았다. 그 노래는 5·18 때문에 만들어졌고, 행사 때마다 부르던 곡이다. 국민대통합을 외친 박근혜 대통령이었기에 아쉬웠다.”
― 박 대통령이 직접 불렀다면 더 좋았겠다?
“윤창중 전 대변인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때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광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는 게 맞다’ 이렇게 한마디 했다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 오늘(4일)이 박근혜 대통령 취임 100일째 되는 날이다.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으로서 박근혜 정부 100일을 평가한다면.
“그동안 그런 이야기를 해 달라며 숱하게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자제해 왔다. 자유인이라니 한마디 보태자면, 어느 언론에서는 취임 초보다 지지율이 올랐다, 또 어디는 떨어졌다 말이 제각각이다. 그런데 수치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부 초반은 인사가 만사여야 하는데 그게 안 됐다. 이 부분은 여당 내에서도 잘못됐다고 할 정도다.”
2012년 8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다. 맨 왼쪽이 김현철 교수. 사진공동취재단
“윤창중 전 대변인이 상징적으로 되었지만 대통령 본인 책임도 크다. 과거 군부 시대에서는 대통령이 권력기관을 동원할 수 있었고,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결국 대통령의 가장 큰 권한이 인사권이다. 인사 문제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데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 실수였다. 소통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 예견된 참사를 불렀다.”
― 윤창중 전 대변인과의 트위터 해프닝은 어떻게 된 것인가(김 교수는 지난 12월 26일 자신의 트위터에 ‘지난 총선 전에 누굴 통해 문제의 윤창중을 만났더니 대뜸 나에게 박지만이와 친하니 한번 만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거다. 파시스트 윤을 추천한 인사가 누군지 금세 알 수 있는 대목’이라는 글을 올렸다가 논란이 일자 5시간 만에 삭제했다).
“윤 전 대변인과는 개인적으로도 알던 사이다. 그런 분이 대선 앞두고 종편에 나와서는 나를 두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뿐만 아니라 정운찬 전 총리나 김덕룡 전 대표에게 ‘정치적 창녀’란 표현까지 썼다. 그런 사람을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흥분한 상태에서 SNS에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착각을 했었던 것 같다.”
― 19대 총선이 1년이 훌쩍 지났다. 당시 낙천하고 무소속으로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출마하지 않았나.
“참 기가 막히는 스토리가 있다. 거제 출마는 17대 총선 때부터 꾸준히 준비했다. 한나라당 시절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3년간 있으면서 경력관리도 충분했기에 19대 총선은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공천 신청 안 하고 무소속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 새누리당 소속인데 무소속으로 나가려고 했다니.
“그때 홍준표 대표가 물러나고 박근혜 비대위 체제가 들어섰다. 이상돈 교수를 비롯한 비대위원들이 내 전력을 문제 삼았다. 거기엔 박근혜 비대위원장 뜻도 담겼다고 생각해 공천 신청 자체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권영세 사무총장(현 주중대사)이 ‘왜 신청 안 하느냐’고 강력하게 이야기했었다. 그렇다면 박근혜 위원장에게 직접 약속을 받아야겠다고 했더니 권 총장이 자신 있다며 결국 신청을 하게 만들었다. 전략 공천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경선을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너무 믿은 게 잘못이었다.”
― 당초 생각대로 무소속으로 나갈 수도 있지 않았나.
“이미 거제에 무소속으로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의 김한표 새누리당 의원이다. 그런데 이분은 나와도 인연이 깊은 것이 문민정부 때 청와대로 스카우트돼 가족경호를 맡았던 사람이다. 정부 말에 본인을 거제경찰서장으로 보내달라고 해 내려간 이후 곧바로 정치권으로 입문했다. 나까지 나가 4파전 양상이 되면 결국 야당 후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참 간단치 않다.
“그때는 정말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국회에서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는데 1분이면 읽을 내용을 갖고 목이 메 5분은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는 새누리당에서 나왔다.”
― 당시 박근혜 비대위의 공천시스템이 박근혜 정부 인사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고 보나.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다. 총선 때도 시스템에 의한 공천을 했다고 말했지만 거제에 경쟁력 없는 사람을 내 무소속 후보가 당선됐지 않나. 그 때나 지금이나 1인 인사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새누리당 탈당 이후 김현철 교수는 대선 막판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를 지지하고 “아버지도 동의했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새누리당 진영에서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단단히 찍혔다. 당시 문 후보 지지 선언은 단순히 공천을 받지 못한 데 대한 한풀이는 아니었을까.
“그건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박근혜 당시 후보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부터 이어진 구시대 정치를 대표했고 주변 인물들 역시 너무 과거 지향적이었다. 단순히 새누리당 출신이기 때문에 지지할 수는 없었다.”
― 중립을 지킬 수도 있었지 않나.
“문재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모른다. 어쨌든 새로운 정치를 대표하는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반대쪽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그 과정에서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게 보수 진영에서 문 후보를 두고 ‘종북 정치인’이라며 이야기하던 것이다. 민주당 역시 100석 이상 현역 국회의원을 가진 수권정당인데 종북당으로 매도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또 큰 틀에서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셈이 됐다.”
― 그때 YS의 의중은 어땠나.
“아버님은 어떤 후보에 대해서도 지지 선언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결국 공식 지지 선언은 없었다. 하지만 여당 쪽에서 김무성 의원이라든지 김수한 전 국회의장 같은 분들이 집요하게 아버님에게 공식적으로 지지를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박근혜 후보와 전화통화도 하게 만들고. 이 과정에서 옛 민주산악회 회원들의 박근혜 지지선언이 이어지고 여당 쪽에서도 ‘YS의 생각은 박근혜 후보에게 있다’는 식으로 여론을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모양이 됐기 때문에 내가 더 공격을 받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당시 대선이 박빙 양상으로 전개되자, 여야 대선캠프에서는 YS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물밑 작업으로 뜨거웠다. PK(부산·경남) 지역 표심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대선이 끝나고 문재인 캠프 핵심에서 일했던 한 의원은 사석에서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YS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 YS가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으로 보나.
“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지 알 수는 없지만 아버님이 민주화와 PK지역 상징성이 있는 분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도 원래 문재인 후보 부산 유세 때 나가려고 했었다. 혼자 나가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동교동계, 그 중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아들 가운데 누군가와 함께 유세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1990년 삼당통합 이전으로 돌아가 동서화합이라는 의미를 담을 것이라 생각했고 문재인 캠프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성사될 줄 알았는데 동교동계의 반대가 있어서 결국 불발이 됐다.”
― 만일 이벤트가 성사됐다면 새누리당 국민대통합과 민주당 동서화합 간의 대결이 됐을 수도 있었겠다.
“지금도 진정한 동서화합은 우리로부터 출발하고 우리가 해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다시 그런 일들을 시도해 볼 생각이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문민정부 비화 낱낱이 밝힌다
2009년 11월 26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재하는 동교동계-상도동계 합동 만찬 회동에서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이 인사를 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문민정부의 ‘소통령’이자, 정권 비리의 ‘몸통’으로 불리며 90년대 신문지상을 장식했던 그였다. 그때 그 시절, 김현철 교수는 얼마나 많은 뒷얘기와 사연과 곡절을 숨기고 있을까. <일요신문>은 앞으로 김현철 교수와 문민정부 당시 비화를 돌아보고 그 속의 시사점과 한계점을 더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하나회 숙정’ 사건이 떠올랐다. 1993년 3월, 별 40개가 한꺼번에 떨어지기까지 문민정부 컨트롤타워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