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04년 당 대표 취임 때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을 따로 만난 일이 없다. 인수위사진기자단
지난 6월 11일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가 열린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이 이전 정부부터 이어져오다 현 정부에 터지기 시작한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은 특히 “전직 대통령 추징금 문제도 과거 10년 이상 쌓여온 일인데 역대 정부가 해결 못하고 이제야 새 정부가 의지를 갖고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 차제에 새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것은 난센스적인 일”이라며 “과거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또한 “그동안 국민들은 어렵지만 적은 세금이라도 내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런 고질적 문제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국민 피해를 준 경우가 있다. 일각에서는 고의적, 상습적 세금을 포탈하는 등 사회를 어지럽혀 왔다. 이런 행위는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발언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전두환 씨의 숨겨진 재산과 관련, 박 대통령이 강력한 추징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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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3일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이 열린 국회 본회의장. 정홍원 국무총리가 안민석 민주당 의원과 다소 생뚱맞게 박 대통령 재산의 사회 환원 여부를 놓고 얼굴을 붉히며 신경전을 벌였다. 지난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뒤 박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날 때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으로부터 받았다는 6억 원이 화근이었다.
안 의원은 “박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받은 6억 원은 물가상승률 기준으로 현재 33억 9000만 원”이라며 “박 대통령의 재산은 26억 원으로 신고됐는데, 전 재산을 동원해도 부족한 돈을 갚겠다는 게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다. 지난해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이 ‘문제의 6억 원’에 대해 사회 환원 의사를 밝혔던 사실을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그러자 정 총리가 “의원님께서 일방적으로 가치 환산을 해서 주장하는데 어떻게 답을 하라는 말이냐. 이런 정치공세는 적절치 않다”며 발끈했다.
이틀 차이로 연결된 두 장면은 박 대통령과 전두환 씨 간의 ‘가늘고 긴 악연’이 2013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박 대통령은 사실 전 씨와 가까웠던 적도 없고, 가까워지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의 실현 차원에서 전 씨의 미납 추징금을 환수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게 엉뚱하게 자신의 재산 환수 논란으로 불똥이 튄 것에서 보듯, 박 대통령에게 전 씨는 ‘엮이고 싶지 않지만 이상하게 계속 엮이게 되는’ 사람인 셈이다.
전두환 씨는 준장 시절인 1976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되면서부터 인연을 쌓았다. 하지만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9년 10·26 사태 이후다.
박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박 대통령과 동생 근령, 지만 씨 등이 청와대를 떠나야 할 상황이 됐을 때 합수부장이었던 전 씨가 박 대통령에게 6억 1000만 원을 전달했다. 합수부가 청와대 비서실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집무실 금고에서 발견한 9억 6000만 원 중 일부를 생활비 조로 박 대통령에게 줬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김영삼·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
당내 경선 와중이었고, 또 경선 결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후보로 선출되는 바람에 이 문제는 큰 이슈로 부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18대 대선 첫 TV토론 때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가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면서 빅 이슈로 급부상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재차 해명하면서 “저는 자식도 없고 그 어떤 가족도 없는 상황”이라며 “나중에 그건 다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 환원’이라는 카드를 꺼냈음에도 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1979년 당시 6억 원의 가치를 단순히 계산해도 32억 원이 넘고, 아파트 가격으로 환산하면 200억 원이 넘는다는 주장까지 나왔던 것이다. 대선 결과가 박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자칫 전 씨로부터 받은 6억 원이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6억 원 논란’은 실제 일이 벌어진 지 한참 지나서 박 대통령에게 위협으로 다가왔지만, 박 대통령과 전 씨의 불편한 관계는 전두환 정권 출범 후부터 시작됐다. 전 씨가 1980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부터 박정희 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전 씨는 박정희 정부 시절의 통행금지령 등 여러 정책을 폐지한 데 이어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공화당 정치인들을 부정부패 혐의로 처벌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한때 박 전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들까지 그를 격하시키는 데 앞장서는 상황으로 연결됐다. 아버지가 자신의 육군사관학교 후배인 전 씨를 총애했던 것을 지켜봤던 박 대통령으로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해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의 이른바 ‘배신 트라우마’에 전 씨도 일조한 셈이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술했다.
“청와대를 나온 이후 정권 차원에서 아버지에 대한 매도가 계속됐다. 우리 3남매는 부모님의 기일을 포함한 어떤 공식적인 행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치를 수 없어 집에서 조용히 동생들과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가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이루셨던 일을 폄하하고 무참히 깎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무덤 속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인신공격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 같은 악연 때문인지 프로토콜(의전)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이 유독 전 씨에게는 소홀하다. 박 대통령은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취임인사차 전 씨를 예방한 이후 현재까지 그를 따로 만난 일이 없다.
이에 대해 한 여권 인사는 “애국심 하나로 똘똘 뭉친 박 대통령에게 아버지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이지만 전 전 대통령은 ‘개인 야욕으로 민주 질서를 어지럽힌 정치인’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