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 19일 열린 민주산악회 현판식.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아버지(YS)는 민자당 대표 시절부터 ‘대권 수업’을 받아 왔다. 민주화 투쟁 등으로 오랫동안 굳어진 야당 이미지를 벗고 국가지도자로서의 덕목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는 대선후보로 결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모한 도전이었다.
수업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이때 내가 맡은 역할은 분야별로 교수들과 법조계, 언론계 등 인맥을 동원해 하나의 싱크탱크로 묶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인 이들은 문민정부가 해야 할 일들을 분야별로 점검하고 의논해 나갔다.
선거가 다가오면서는 경제 분야에 대한 집중 레슨이 시작됐다. 달변가인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경제인 출신인 정주영 후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학자들이 정책자문교수단이라는 이름으로 도움을 줬는데 이들은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 소속해 YS를 계속 도왔다.
1992년 대선을 떠올리는 이들은 전병민 실장의 ‘동숭동팀’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해 하는 것 같다. 동숭동팀은 전병민 실장이 만든 정치컨설턴트 회사 ‘임팩트 코리아’가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전 실장은 원래 YS 사람은 아니었고 대선 직전에 인연이 되어 함께했다. 그 전에는 노태우 정부 당시 이영호 체육부 장관이 만든 한국정책연구원 기획실장으로 있었다. 지금도 그가 전 실장으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동숭동팀의 주된 역할은 분과별로 전문가들을 모아 정책보고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전 실장은 분과별 회의가 끝나고 캠프 측에 보고해야 할 때 일종의 연락간사 역할을 담당했다. 분과별 회의는 동숭동보다 시청 인근에 위치한 호텔을 옮겨 다니며 이루어졌다. 선거 전략과 함께 집권 이후 개혁안들이 논의되는 자리였기에 보안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동숭동팀 멤버들은 다른 분과위에서 어떤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당시 언론에서 “자신들이 동숭동팀인지도 모른 채 활동했다”는 식으로 보도한 것은 지나친 억측이 아닐까 싶다.
문민정부 초반 동숭동팀은 청와대 내 민정·정무·총무·교문사회·공보 등 각 수석실에 골고루 배치돼 계속 호흡을 맞췄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돈식 정무수석, 박재윤 경제수석,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등이 있다. 뒤에 들어온 김영수 민정수석도 동숭동팀의 일원으로 볼 수 있고 내각에 들어간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실제 정책기획을 주도하기도 하고 금융실명제와 같은 큰 아이디어를 실행시키기도 했다.
동숭동팀을 이끌었던 전병민은 청와대 정책수석 임명 3일 만에 낙마했다.
동숭동팀이 막후에서 활동한다는 인상을 깊게 남긴 것은 아마도 선거를 직접 뛰거나 YS를 직접 만난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당선 직후 YS가 동숭동팀 사람들을 초청해 오찬을 가진 것은 한두 번뿐이었다.
반면 내가 주축이 됐던 ‘광화문팀’은 앞에서 뛰는 조직이었다. 광화문팀은 주로 대선 일정을 조정하고 언론 대응을 맡았다. YS는 틈틈이 광화문 사무실에서 TV토론을 대비하기도 했는데 실전과 똑같이 카메라를 미리 세팅해 놓고 질문을 맞춰보곤 했다. 당시 광화문팀이 대통령 연설에 프롬프터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정책자문교수단들도 일주일에 한 번씩 광화문팀과 식사를 하면서 모임을 가졌다. 지금으로 치면 정치인 공부모임이었던 셈이다.
동숭동팀과 광화문팀 멤버들이 청와대와 내각에 들어갔던 것은 정책의 연속성을 위해서였다. 5년 단임제의 한계 때문에 2년 안에 모든 개혁 내용을 제도화하지 못하면 통치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통령과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하며 동고동락한 민주계 인사들의 시선이 마냥 곱지는 않았다.
1992년 대선의 또 다른 핵심 축이었던 민주계 인사는 ‘민주산악회’와 ‘나라사랑실천본부’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민주산악회가 야당 시절부터 함께한 올드 멤버들로 이루어졌다면 나라사랑실천본부는 선거를 위해 새롭게 구성된 젊은 조직이었다. 나와 함께 김혁규 전 경기지사, 김무성 의원, 김영춘 전 의원 등이 핵심에서 활약했다.
이런 사조직들은 선거가 끝나고 대부분 해체됐다. 불편부당한 정권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나로서는 아쉬운 면도 있었다. 특히 이들을 사후 관리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으로 남게 됐다. 나름대로 모두 YS 당선에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기에 불만이 쌓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때문에 사조직 사람들의 불만을 듣고 그 일부를 청와대에 전달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 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청와대 내각에 있는 사람들, 심지어 당에 있는 사람들조차 대통령에게 직접 하기 힘든 부탁을 나를 통해 하려고 들었다.
그 무렵 나는 공개적으로 정치권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나는 YS에게 “박준규 국회의장 비서실에 들어가 직함을 갖고 당당하게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통령 아들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말았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대형금고 용접공 불러 분해”
김영삼 대통령이 1998년 1월 7일 문민정부의 역대 총리들을 초청해 만찬을 했다. 일요신문 DB
―청와대에 처음 입성했던 날이 생생할 것 같다.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어 청와대에 살지는 않고 주말마다 가족들을 동반해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했다. 당시 청와대는 건물부터 권위적인 느낌이 강해 구중궁궐 같았다. 아버님 역시 외로워했고 ‘절간 같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
―YS가 취임 직후 청와대 집무실 금고를 보고 엄청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도 직접 봤다. 대형 금고가 청와대 집무실에도 있었고 대통령 관저에도 있었다. 은행에서 쓰는 대형 금고를 상상하면 될 거다. 그 존재만으로도 전 정권의 통치자금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물건이었다. 문민정부가 정치자금에 있어서만큼은 깨끗한 정부가 되겠다고 밝힌 만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원래는 그대로 옮기려고 했는데 크기가 너무 커 용접공들을 불러 분해해 버렸을 정도다.”
―첫 휴가 때도 궁금한데, YS와 함께했나.
“물론이다. 청와대에서 헬기를 띄워 청남대까지 날아가는데 대통령이 헬기를 타면 똑같은 모양의 헬기 여러 대가 함께 뜨는 게 장관이다. 북한 공격을 대비한 조치였던 것 같은데 어떨 때는 전방에 있는 초계기들이 함께 뜨기도 한다.”
―지금 청남대는 일반인도 갈 수 있게 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전용 별장을 없애고 일반에 공개한 것은 정말 잘못한 것이라고 본다. 대통령은 쉴 때는 확실하게 쉴 수 있어야 한다. 쉴 곳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면 주변에 민폐만 끼친다. 경호로 인해 아무 호텔에서 묵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외에 나가면 혈세 낭비라는 비난이 쏟아져 자칫 휴가가 스트레스가 된다.”
―청와대에서 기거하지 않으니 경호가 문제였을 텐데.
“원래 청와대 측에서 경호 차량을 제공하겠다고 했는데 차량까지는 필요 없다고 했다. 경호 차량이 따라다니면 일상이 불편하기도 하고 경호원도 4명이나 필요하다.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경호원 1명만 내 차에 동행시켜 다녔다.”
―청와대 관저에는 취사시설이 없다는 것도 사실인가.
“영부인이 직접 요리하는 시스템은 아니다. 원래부터 상도동 자택에는 요리라는 개념이 없었다. 문턱이 닳도록 사람들이 오가고 하루에 많게는 100명까지 식사를 대접할 때도 있어 요리를 할 수가 없다. 김치나 멸치볶음과 같이 몇 가지 밑반찬을 미리 준비해 놓고 내는 정도였다. ‘민주멸치’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도동 식구가 아니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