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그랜트(오른쪽)와 랜돌프 스콧이 게이 커플이라는 소문은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캐리 그랜트와 랜돌프 스콧이었다. 그들이 양성애자이며 게이 커플이라는 소문은 수많은 증거와 증인들을 토대로 세간에 떠돌았지만, 그들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그 관계를 확정하지 못했다. 이 모호함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먼저 캐리 그랜트. 영국 출신인 그가 배우의 꿈을 품고 맨해튼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룸메이트는 패션 디자이너인 잭 켈리다. 그와 손을 잡고 할리우드로 왔을 때 그랜트를 중용한 사람은 조지 쿠커 감독. 할리우드 게이들의 대부였던 그는 그랜트의 잠재력을 알아봤다.
1932년 <뜨거운 토요일>에 출연했을 때 그랜트는 랜돌프 스콧과 공연하게 된다. 그랜트보다 6세 위였던 스콧은 서부극 전문으로 유명한 배우다. 그들은 곧 친구가 되었고, 급기야 말리부 해변에 7개의 방이 있는 집을 사 그곳에서 함께 지낸다. ‘독신자 저택’(Bachelor Hall)이라고 이름 붙인 그곳은 이후 12년 동안 그들의 아지트가 된다. 놀라운 건 그들이 독신자가 아니었음은 물론 여러 차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캐리 그랜트의 첫 아내는 버지니아 셰릴.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1931)에 ‘눈 먼 여인’으로 등장했던 그녀는 1934년에 그랜트와 결혼했다. 그런데! 그랜트는 새로 신혼집을 구하지 않고 ‘독신자 저택’으로 셰릴을 오라고 했고, 그녀는 13개월의 결혼 생활 동안 두 남자와 함께 생활했다.
1942년엔 엄청난 돈을 상속받은 사교계 인사였던 바버라 허튼과 결혼해 3년 동안 함께 살았고, 1949년엔 19세 연하의 여배우였던 베시 드레이크와 결혼했다. 그들은 13년 동안 부부였다. 1965년엔 34세 연하의 여배우 다이언 캐넌과 결혼해 1966년에 딸 제니퍼를 낳았다(당시 그랜트는 62세였다). 그리고 1981년 77세의 그랜트는 47세 연하의 호텔 홍보 전문가인 바버라 해리스와 결혼했고 1986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랜돌프 스콧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아내는 사교계 인사였던 마리아나 두퐁 서머빌. 그리고 1944년에 결혼한 패트리샤 스틸먼과 스콧은 두 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며 스콧이 세상을 떠난 1987년까지 34년 동안 해로했는데, 스콧의 유족들은 모두 남편과 아버지가 게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배우들 자신도 조심스레 행동했다.
주변 사람들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랜트의 연인 중 한 명이었던 모린 도널드슨은 그랜트가 자신에게 “첫 번째,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한 건 그들이 내가 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메이 웨스트나 마를렌 디트리히 같은 당대의 여배우들은 서슴없이 “그랜트와 스콧은 게이 커플”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조지 쿠커 감독도 처음부터 그들이 동성 연인임을 이야기했고, 한때 그랜트의 동성 연인이었던 패션 디자이너인 리처드 블랙웰은 “그랜트와 스콧은 깊게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다. 마크 엘리엇은 <캐리 그랜트: 그의 비밀스러운 여섯 번째 결혼>(2004)라는 책에서 그랜트와 스콧은 1932년에 만났을 때부터 육체적 관계를 맺었으며, 그들에 대한 소문이 업계에 파다하게 퍼져 함께 출연할 수 있는 영화를 놓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콧뿐만 아니라 그랜트는 말런 브랜도, 에롤 플린, 타이론 파워 같은 남성미 넘치는 배우들과 연인 관계였으며, 항공 산업의 풍운아이자 영화 제작자였던 하워드 휴즈는 그랜트와 스콧 모두와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여기에 그랜트의 네 번째 아내였던 다이언 캐넌은 “그랜트가 외롭게 자라 젊은 시절에 만난 스콧에게 어떤 가족의 정을 느꼈던 것 같다”며 “나는 그가 게이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게이였어도 그는 록 허드슨처럼, 스튜디오의 요구에 의해 결혼을 한 상태에서 조용히 비밀스럽게 자신의 쾌락을 추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사자들의 견해는 어땠을까? 그랜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게이에 대한 혐오감 같은 건 전혀 없다. 하지만 나는 게이가 아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