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10월 3일, 목요일 오전 9시 30분 평양 백화원 영빈관. 회의장에는 남측의 노무현 대통령을 필두로 이재정 통일부 장관,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백종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조명균 안보정책비서관과 북측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리고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대동했다.
가벼운 담소로 시작된 양 정상 간 회담은 이따금씩 농을 주고받으며 이완될 때도 있었지만,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진행됐다. 회담장에서 황해도 해주와 관련한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남측의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은 회담 초반 남북 공동번영을 위한 경제 협력 안을 제안하는 대목에서 “개성공단의 성공을 발판으로 남북이 함께하는 경제특구를 추가로 개발하는 것이 장애요인을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안일 것”이라며 “특히 해주 지역에 기계·중화학 공업 위주의 서해 남북 공동경제 특구를 설치하게 되면 ‘개성-해주-인천’을 잇는 세계적인 공단, 경제지역으로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처음으로 ‘해주 특구’를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회담 초기, 노 대통령의 ‘해주 특구’ 제안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반응은 딱 잘라, 부정에 가까웠다. 김 위원장은 “실질적으로 우리와 이해관계가 없다. 동의할 수 없다”며 “개성도 군사적으로 많이 양보한 건데, 개미 한 마리 들어갈 수 없도록 군사력이 밀집돼 있는 해주는 국방위원장으로서 내 줄 수 없다”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다만 그는 “개성에서 어떤 모범을 보이고 실제 그만한 것을 희생시키면서라도 민족 번영에 이바지할 가치가 있다면, 그땐 주겠다”고 단서를 덧붙였다. 개성의 성과에 따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개성공단에 있는 한 신발공장 모습.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중 김정일 위원장에게 해주에 경제특구 건설을 제안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어 “서해문제에 대한 남측의 실질적 요구는 무엇이냐”는 김정일 위원장의 질문에 노무현 대통령은 “NLL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다”는 논란적 발언 속에서도 “거기에 대해 말하자면 서해 평화지대를 만들어서 공동어로도 하고, 한강하구에 공동개발도 하고, 나아가서는 인천, 해주 전체를 엮어서 공동경제구역, 공동어로구역, 자유통항구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 배석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6월 27일 <일요신문>과의 단독 인터뷰(4~5쪽 참조)에서 “서해평화협력지대는 NLL 위에 안보적 개념을 넘어 경제적 개념까지 카펫 깔 듯 덮어 놓은 것”이라며 “그 부분에 있어서 해주항을 열고 특구를 만드는 것이 꼭 필요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해주 특구 안 중 구체적인 핵심 사안으로 조선 공업을 제시하며 “조선 부분이 파급효과가 크다. 조선 하나 하려면 각종 부품공업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데, 몇 년 하고 나면 독자적으로 북측 인민들이 창업을 하게 될 것”이라며 “북측 경제에 획기적인 기술이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우리에게는 실질적 이득이 없을 것”이라며 특구에 대해 회의감을 내보인 김 위원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설득에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이재정 전 장관은 “해주 발상은 당시 기존의 해외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한계에 부딪히고 있던 조선업계, 특히 조선협회의 직접적인 요구에서 나온 것”이라며 “남북회담 이전, 이들과 이미 접촉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설득이 통했을까. 김 위원장은 오후 2차 회의에서 성사는 안됐지만, 지난 과거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에 제안했던 ‘해주항’ 개방을 통해 개성공단의 물동량을 감당하고자 했던 사례를 제시한다. 해주 특구 안에 대해 난색을 표했던 회담 초반의 입장에서 벗어나며 점차 점진적인 안을 꺼내기 시작한 것. 그리고 쉬는 시간 군과 논의 결과 해주항 개방은 가능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회담 내 주요 의제였던 NLL 문제 및 서해평화협력 얘기가 오갈 때마다 ‘톱니바퀴’처럼 해주 특구에 대한 ‘밀당(밀고 당김)’이 병행됐다는 사실은 일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에 공개된 대화록을 두고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 내내 NLL 문제와 관련해 일부 김정일 위원장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논란적 언급을 이어갔던 것은 결국 ‘해주’를 얻기 위해 무리수를 띄운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를 반대로 보자면, NLL 문제의 핵심 열쇠로, 더 나아가 남북경협 활성화의 열쇠로 해주 특구를 삼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해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해주라고 하는 도시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주는 황해도 남부에 자리 잡은 항구도시이자 산업도시다. 지리적 여건상 잘만 개발한다면, 인천과 함께 ‘환황해권(남북한-중국-일본)’ 핵심 산업도시로 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평가다. 또한 철도와 육로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인근 개성과의 시너지 효과 역시 가능하다. ‘서울 앞 인천, 평양 앞 남포’처럼 개성과 연결되는 일종의 ‘갑문’ 역할 역시 가능하다는 것.
무엇보다 군사적 긴장도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는 측면이 큰 메리트였다. 한 고위급 출신 탈북자는 “해주는 북한 해군력의 집결지다. 현재의 개성공단 역시 다수의 장사정포가 철수된 곳이다”라며 “인천-해주를 오가는 상시적인 항로만 운영된다면 NLL 부근의 군사적 긴장도 역시 자연스레 경감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 자체가 무리라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 재임 중기 남북회담을 통해 가시적 성과를 내온 김대중 정부와 다르게, 당시 노무현 정부는 정권 교체가 유력시되던 재임 말기였기 때문. 정권의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국내 사정상, 해주 특구 제안 자체는 그저 정권 말미 성과 채우기에 급급한 상징적인 제안 수중의 프로젝트 아니었겠느냐는 지적 또한 존재한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충격 넘어 경악” vs “특유의 반어법”
이번에 공개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은 노무현 대통령의 ‘NLL포기 발언’의 실질적 포함 여부가 핵심 사안이지만, 그밖에도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의 몇 가지 발언을 두고 저자세 외교, 굴욕 외교 시비를 붙이고 있는 상황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제는 이러한 김 위원장의 자주성 시비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가 미국에 의지해 왔으며, 친미국가다. 이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 있다. 물론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그 수준으로 올려버리면 세상에 자주적인 나라가 공화국밖에 없다”며 “남측의 어떤 정부도 하루아침에 미국과 관계를 싹둑 끊고 북측이 하는 것처럼 자주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점진적 자주 하겠다”며 설득의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지만, 어찌됐건 ‘노무현식 발언’이 정상회담에서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또한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한 적절치 않은 언사도 시비 거리로 붙고 있다. 노 대통령은 당시 북핵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도중 “한나라당은 올라가서 핵 얘기를 많이 쓰라고, 시비를 자꾸 걸라고 벼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측에서는 회담 주요 의제로 ‘북핵’을 올리자는 주장이었지만, 노 대통령 본인은 이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 원활한 여야 파트너십과 야권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어야 할 대통령 입장에서 적절치 못하다는 설명이다.
당시 회담에 배석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이러한 노무현식 화법과 저자세 논란에 대해 <일요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노무현식 화법은 반어법”이라며 “특히 자주성 시비에 대한 논리적 맥락을 놓고 보면 결국 영국도 패권국가인 미국 앞에서는 자주하지 못하며, 한국도 북한도 현실적으로 미국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전략적으로 풀어나간 것”이라고 반박했다. 노무현식 화법과 그 나름의 논리 속에서 김 위원장을 설득해 북한을 국제사회에 끌어들이겠다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해명이다.
이러한 화법에 대한 시비도 시비지만, 오전 회담 말미, 회담 연장을 요구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자세를 두고도 현재 여권에서는 ‘애원 외교’라는 표현으로 비판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말할 시간을 더 달라며 “여기까지 와서 위원장하고 달랑 두 시간 만나 대화하고 가라고 그렇게 말씀하면 되겠는가. 충분히 위원장하고 시간을 더 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충분히 할 얘기는 다 했다”며 “나머지는 총리급 이하 실무자들끼리 해도 되지 않느냐”며 난색을 표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거듭된 회담 연장 요구로 오후 회담이 진행됐지만, 여권과 일각에서는 그럴 필요까지 있었느냐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이에 대해 이재정 전 장관은 “7년 만에 열린 정상회담이다. 언제 또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최대한 여러 가지 일을 합의할 필요가 있었다. 또 김정일 위원장은 실무급에서 논의하라고 지적했지만, 북한 체제 특성상 어떤 일도 위원장 허락 없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이 때문에 회담 연장을 요구했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