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의 영결식.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관련기사=고 박용오 인물탐구 70~71면]
박용오 회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성지건설 측은 즉각 사인을 심근경색이라 밝히고 나섰다. 몇 해 전 심장수술을 받는 등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고 박 회장이 목을 맨 흔적과 그가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를 발견하면서 사망 원인을 일단 자살로 결론내린 상태다. 이렇다 보니 한때 두산그룹을 쥐락펴락했던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하게끔 만든 배경에 궁금증이 쏠리고 있다.
일단 재계에선 고 박 회장을 괴롭혀 온 스트레스의 근원이 지난 2005년 일어났던 두산가 ‘형제의 난’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해 7월 18일 두산 오너일가가 3남 박용성 회장을 새 총수로 추대한 것에 대해 당시 그룹 회장이었던 고 박 회장이 반발한 것이 형제의 난을 불렀다.
당시 고 박 회장은 회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주는 대신 두산산업개발(현 두산건설)의 계열분리를 요구했지만 묵살됐다. 이에 고 박 회장은 같은 달 21일 ‘두산그룹 경영상 편법 활용’이라는 제목의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박용성-용만(5남) 형제 등 오너 일가가 위장 계열사를 통해 870억 원을 밀반출하고 계열사를 통해 17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두산그룹은 고 박 회장을 제명하는 동시에 고 박 회장이 경영을 맡았던 두산산업개발의 2700억 원대 분식회계 사실을 폭로하면서 형제간 다툼이 가열됐다. 이는 결국 두산 오너 일가에 대한 대대적인 검찰 수사를 불렀다. 특가법상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용성-용만 형제는 2006년 8월 항소심에서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80억 원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40억 원의 형을 선고받고 상고를 하지 않았다. 같은 혐의로 기소됐던 고 박용오 회장은 2007년 2월 대법원 판결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80억 원의 원심이 확정된 상태였다.
제명되기 직전 고 박 회장의 두산산업개발의 계열분리 요구는 비단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게 재계 일각의 관측이다. 두산산업개발은 고 박 회장의 장남 박경원 현 성지건설 부회장이 근무했던 회사다. 당시 재계엔 “아들에게 물려줄 회사로 (고 박 회장이) 두산산업개발을 염두에 뒀는데 의도대로 풀리지 않은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았다.
형제의 난이 일어날 당시 박경원 부회장은 두산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였다. 두산산업개발에서 상무까지 지낸 박경원 부회장은 2002년 전신전자를 인수, 벤처업계에 뛰어들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인수 첫 해인 2002년 전신전자는 19억 원의 적자를 내고 만다.
▲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왼쪽에서 첫번째), 박용현 두산그룹 회장(세번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네번째) 등이 두손을 모으고 영결식을 지켜보고 있다. | ||
고 박용오 회장은 지난해 2월 성지건설을 인수하며 재기의 나래를 펼쳤다. 성지건설 지분 24.4%와 경영권을 730억 원에 매입해 경영 일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시 고 박 회장은 성지건설을 10위권 건설사로 올려놓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고 박 회장이 회장직에 앉긴 했지만 대표이사로 나서지는 않았다. 대신 사업실패로 절치부심하던 아들 박경원 부회장을 불러들여 대표이사에 앉혔다.
그러나 박용오 일가가 인수한 이후로 성지건설은 주택경기 침체 영향으로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인수 이전인 2007년 영업이익 187억 원을 올렸던 성지건설은 지난해 135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데 그쳤다. 2007년 80억 원이었던 당기순이익은 2008년 들어 10억 원대로 곤두박질쳤다. 2007년 1778억 원이었던 부채 규모도 박용오-경원 부자 체제로 전환된 2008년 3191억 원으로 두 배가량 늘어났다.
올 상반기 실적은 더 참담했다. 영업이익은 그나마 18억 원을 기록했지만 43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 적자법인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지난해 인수 당시 시공능력평가 55위였던 성지건설은 올해 69위로 내려앉은 상태. 고 박 회장의 사인을 자살로 단정 짓게 한 유서엔 ‘어려운 회사 사정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가 담긴 것으로 알려져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한편 회사 실적 못지않게 박용오-경원 부자의 개인 부채도 제법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 박 회장이 숨을 거두기 전까지 기거했던 성북동 빌라와 박경원 부회장의 등기부상 주소지인 서울 서빙고동 소재 고급 아파트 등기부엔 수십 억 원의 근저당권 설정이 돼 있다. 성북동 빌라는 한때 법원의 가압류 처분을 받기도 했다. 현재 이 두 집은 모두 박경원 부회장 명의로 돼 있다.
장남의 사업 실패, 그리고 재기의 포부를 갖고 거액을 들여 인수한 성지건설의 실적 악화로도 모자라 고 박 회장은 차남 박중원 씨가 영어의 몸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박중원 씨는 지난 2007년 코스닥 상장사 뉴월코프 주식을 사들이는 것처럼 허위공시해 주가를 조작한 혐의(증권거래법 위반)로 구속 기소돼 지난 7월 1심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박 전 회장 비보를 접한 재계에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장남의 거듭되는 불운과 뜻하지 않았던 차남의 옥바라지를 맡아야 했던 아버지로서의 고통이 가문에서 퇴출당했던 설움보다 컸을 것”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