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생각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정부 출범 이후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언론이 문제였다. 보수 언론들은 “문민정부가 개혁을 부르짖지만 금융실명제만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라며 바람을 잡고는 했다. 정작 8월 12일 금융실명제가 전격 시행되자 태도가 백팔십도 달라졌는데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는 금융실명제를 깜짝쇼 하듯 진행했다며 각종 비난을 쏟아낸 것이었다. 꼭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가 너무 다른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드러내 놓고 일을 도모한다면 배가 산으로 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강경식 부총리 역시 “금융실명제 문제는 국회에서 논의한다거나 공청회를 여는 식으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 역시 아버지께 “가장 중요한 개혁은 임기 1년차에 해치워야 한다”고 자주 말씀드리곤 했다. 취임 이후 가족들과 함께 떠난 첫 휴가 때도 YS는 금융실명제에 관한 고민에 잠겼다.
1993년 8월 금융 실명제 실시를 앞두고 국민은행 직원이 고객의 통장과 신분증을 대조해 보고 있다. 일요신문 DB
홍 장관은 “보안이 첫째”라는 대통령의 당부를 고려해 차관보 이상급에는 일절 알리지 않은 채 실국장급에서 실무진을 차출했다. 차관급 이상이 참여하면 보안 유지가 힘들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재무부 소속 김용민 세제실장이 팀을 이끌었고 김진표 전 민주당 원내대표 역시 팀에 포함됐다. 당시 재무부 세제심의관으로 청와대 파견 근무를 하고 있던 차였다.
7월부터는 보안 유지를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강남 대치동 빌딩에 비밀 사무실을 구해 KDI(한국개발연구원) 측과 초안 작업을 진행했고 이후 재무부팀은 과천 주공아파트에 모여 실무 작업을 계속했다. 한 달 넘게 집에도 가지 못한 채 붙잡혀 있으면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생겼다. 공무원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기자들이 의문을 품을 수 있어 일부 직원들은 하와이 해외출장 핑계를 대기도 했다. 트렁크를 끌고 공항에 나갔다 비행기에 타지 않고 곧장 숙소로 오는 식이었다. 가족들에게 해외에 머무는 것처럼 안부 전화도 잊지 않았다.
8월에는 대략적인 윤곽이 나오기 시작했고 실무진도 조금씩 늘어났다. 모두들 다음 순서는 알지 못한 채 계속 준비만 하는 상황이었다. YS는 하나회 숙정 때와 같이 어느 누구에게도 D-Day(디데이)를 알리지 않았다. 황인성 총리도 돌아가는 상황을 몰랐고 청와대 내에서는 박재윤 경제수석조차 잘 몰랐다고 한다. 박 수석은 금융실명제에 관해 부정적인 견해였기 때문에 별도로 알리지 않았던 듯하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실시를 발표했다. 사진제공=대한매일
YS가 채택한 것은 목욕탕수리론인 셈이었다. 금융실명제에 관한 대통령의 의지가 측근들의 반대 여론에도 꺾이지 않은 것이었다. 6월 말 처음 지시를 내린 이후 한 달 보름가량 진행된 금융실명제는 8월 12일 밤 9시에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함으로써 전격 실시됐다. 이 과정에서 10월까지 가·차명으로 된 계좌에 대한 유예기간을 주면서 다음날부터 창구가 북새통을 이뤘고 결과적으로 90% 이상 실명으로 전환하는 성과를 거뒀다. 금융실명제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 비자금 추징을 가능케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금융실명제와 함께 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공직자 재산공개 역시 문민정부 히트작 중 하나다. YS는 취임 이틀 뒤인 2월 27일 본인의 재산 18억여 원과 함께 청와대 내각 인사들의 재산 역시 국민들에게 전격 공개했다. YS는 당선인 시절 가족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재산공개에 대해 미리 언질을 줬다. 앞으로 취임을 하게 되면 투명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자진해 재산공개를 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가족들에게도 특별히 몸가짐을 당부했는데 이때 들려준 에피소드는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잘 들어봐래이. 중국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 총통이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본보기로 잡은 게 며느리였다카이. 정치권에 며느리가 사치스럽다는 소문이 퍼지자 장개석이가 집을 급습해가 수색을 했더니 실제로 엄청난 양의 보석이 나왔다는 거 아이가. 그날 이후 장개석이 며느리를 불러가 ‘이게 마지막 식사’라며 상자 하나를 건넸는데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아나. 권총인기라 권총.”
1993년 9월 24일 홍재영 재무장관(맨 왼쪽)과 이경식 경제부총리(가운데)가 금융실명제 제2차 후속 조치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매일
국회의원 재산공개 후폭풍은 예상했던 것보다 타격이 컸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다치기 시작하자 YS도 무척 괴로워했다. 그 중 기억에 남아있는 분이 김재순 전 국회의장(현 샘터 고문)의 정계은퇴였다. 김 전 의장은 5대 국회에서부터 YS와 동고동락한 30년 지기나 다름없었다. YS는 조병옥 박사가 이끄는 민주당 구파, 김재순 의장은 장면 총리가 주축인 민주당 신파로 나뉘었지만 두터운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김 전 의장이 재산공개 파동으로 정계를 떠나며 남긴 유명한 말이 ‘토사구팽’이다. 여기에 대한 YS의 답은 ‘선공후사’일 것 같다. 개인적인 미안함과는 별개로 개혁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들의 부정입학 문제로 민자당을 떠나야 했던 최형우 사무총장 역시 기억에 남는다. 삼당합당 때도 YS 곁을 묵묵히 지켜준 김동영 장관이 YS의 대선 승리를 보지 못하고 암으로 세상을 떠난 데 이어 최형우 장관 역시 YS 곁을 떠나게 됐기 때문이다. ‘좌동영 우형우’로 불린 이들은 군사 정권 당시 YS의 측근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무렵 민주계뿐만 아니라 민정계와 공화계 역시 문민정부 초대 내각 인선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안정 속에서 개혁을 추진했던 문민정부는 초대 내각 인선 과정에서도 살얼음판을 걸었다. ‘황인성 총리-이회창 감사원장’ 카드 역시 그러한 맥락 속에서 진행됐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아버지 연금 시절 먹 갈던 그가…”
대통령 취임식 당시 “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며 청렴성을 강조했던 YS에게 1996년 장학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의 구속은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당시 장 실장은 기업과 정당 관계자 40여 명으로부터 27억 6000만 원을 받은 것이 드러나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사건에 대한 김현철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장학로 부속실장 구속은 문민정부 도덕성에 오점을 남겼다.
“특히나 총선을 앞두고 터진 사건이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투표 한 달을 앞둔 3월에 구속됐는데 당시 선거를 위해 뛰던 민자당 의원들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학로 실장은 ‘YS의 집사’라 불린 인물이었는데.
“아버지(YS)께서 가택연금 중일 때 먹을 갈거나 먹지를 손으로 누르고 있는 등 그야말로 잡무를 담당했던 사람이다. 업무 특성상 자연스럽게 청와대 부속실장으로 갔던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만큼 당시 청와대 부속실 위상이 강했던 것인가.
“군사정권 때 청와대 부속실은 사실상 각종 기업을 통한 통치자금 조성 창구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부속실 사람들로서는 비자금을 대형금고에 맡기거나 차명계좌로 돌리는 역할이 당연시됐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대비를 했었어야 했다.”
―총선을 앞둔 정치 공세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장 실장의 비리 폭로를 주선한 오길록 당시 국민회의 종합민원실장은 국민의 정부 때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회사의 자금조성과 관련해 사법처리됐다. 또 비리를 제보한 백 아무개 씨는 ‘오 실장이 폭로 대가로 현금 1억 원과 공원 매점 운영권 등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며 손해배상소송을 내기도 했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폭로 정치에는 문제가 없는 것인지도 돌아봐야 한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