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일각에서는 최태원 회장의 항소심 결과를 어둡게 전망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최 회장 구속 이후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 중심으로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하며 총수 부재에 따른 경영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룹 입장에서 오너 회장의 빈자리는 크게만 느껴졌다. 명색이 재계 3위 그룹임에도 SK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방중 기간 동안 영어의 몸인 최 회장은 경제사절단 일원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최 회장을 대신했지만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SK그룹의 존재마저 희미할 정도였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 총수 사이에서 전문경영인이 큰 소리를 내기는 힘들다”며 “SK가 박 대통령의 방미·방중 기간 동안 총수 부재의 아쉬움을 절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최 회장의 빈자리는 점점 더 커져가지만 적지 않은 재계 관계자들은 현실적으로 항소심에서 최 회장 측이 무죄를 입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최 회장 측의 최선은 구속 상태만이라도 면하는 것. SK그룹은 물론 변호인단, 심지어 최 회장 본인도 이를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는 최 회장의 경영 능력과 공로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 주력하는가 하면, 변호인단은 항소심 공판이 길어지는 것에 개의치 않고 최 회장에게 유리한 증언과 증거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최 회장 본인도 그룹 회장직을 버리고 SK(주) 회장으로 남았으며 그룹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직 역시 김창근 부회장에게 넘기면서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이 같은 노력들은 제왕적 이미지를 벗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형을 피하기 위한 ‘선수치기’로 해석되기도 했다.
최재원 부회장
해당 녹취록에는 이 사건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인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이 김준홍 전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에게 “최 회장은 죄가 없으니까 그냥 사실대로 하자”는 말이 담겨 있으며, 최 회장이 김 전 고문에게 “나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안 알아준다”고 호소한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녹취록만 놓고 보자면 최 회장은 꽤 억울한 상황에 몰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 생각은 달랐다. 지난 2일 서울고법 형사4부(문용선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항소심 12차 공판에서 재판부는 녹취록에 대해 “진정성이 의심 간다”며 “녹취록을 증거로 내라고 상황을 만든 건 아닌지 의심까지 가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최 회장의 무죄를 위해 녹취록을 조작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재판부가 최 회장 측을 얼마나 믿지 않고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최 회장은 1심 때부터 일관성을 보이지 못했다. 1심 선고 직후까지 모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던 최 회장은 항소심 공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펀드 조성 자체는 알고 있었다”며 혐의를 일부 시인했다. 다시 말해 검찰 수사와 1심 재판에서 허위 진술했다는 얘기다.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최재원 수석부회장 역시 입장을 바꿔 검찰에서 진술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뒤집었다.
오너 형제의 진술 번복에 당황한 검찰과 재판부는 김원홍 전 고문과 김준홍 전 대표 역시 오락가락하는 행태를 보이자 적잖이 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고인과 증인들의 행동이 1심 재판은 물론 항소심 공판이 열릴 때마다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항소심 결과가 1심 때보다 형량 축소는커녕 오히려 더 가중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재계 고위 인사는 “사법부를 우롱했다는 이유로 ‘괘씸죄’가 적용돼 형제 모두 실형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최 회장은 물론 1심에서 무죄를 받은 최 부회장마저 유죄로 바뀔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한 법조인도 “재판을 하다 보면 흔히 ‘괘씸죄’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형량과 선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다른 법조인은 “최재원 부회장의 경우 사건에 관여한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재판부가 1심 때는 개인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본 것 아니냐”며 “최재원 부회장이 진술을 번복하면서 1심 때보다 불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형제 모두 유죄로 할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항소심 선고는 오는 8월 예정돼 있다. 하지만 원래 8차로 끝낼 예정이던 항소심 공판이 길어지면서 재판 일정을 장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일단 7월 11일 항소심 공판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돼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우리로서는 김원홍, 김준홍 씨 사이에서 피해를 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재판부가 어떤 결론을 낼지 모르겠다”며 “하루 빨리 회장님이 복귀하셔서 해외 사업 등에 역량을 쏟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