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길 지도부는 친노가 주도하는 NLL정국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지난 10일,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내뱉은 말이다. 그저 별 의미 없이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 말 속에는 ‘NLL(서해 북방한계선) 정국’ 속에서 점점 자신의 자리를 잃어가는 김한길 대표 본인과 민주당 지도부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운 자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현재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문재인 의원에게 던지는 뼈있는 언질인 셈.
김한길 대표는 지난해 전당대회에서 한 차례 패배의 고배를 마신 바 있다. 그것도 당내 최대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친노 진영의 좌장 이해찬 의원에게 ‘모바일 경선’이라는, 내키지 않은 경선방식 탓에 대역전패를 허용했다. 그런 그가 지난 5·4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쥐었다. 지난해 친노에 당한 수모를 단숨에 갚게 됐으니, 본인에게는 얼마나 드라마틱한 순간이었으랴.
물론 당권을 쥐면서 본격 시험대에 오른 김한길 리더십 앞에는 처음부터 여러 가지 의문부호가 뒤따랐다. 박지원 의원은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어떤 지도부가 민주당을 맡더라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어찌됐건 민주당은 지난 대선에서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했고, 박근혜 정부는 임기 초반 드라이브를 건 상황이다. 처음부터 어느 누가 지도부를 맡건 국민 눈에 보이지 않는 형국이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곧 대선 패배 이후 당 재건을 책임져야 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탄생한 김한길 지도부의 태생적 한계에 대해 정곡을 찌른 분석이다.
사실 당권 탄생 초반부만 하더라도 김한길 리더십이라는 한 편의 드라마는 앞서 지적한 태생적 어려움 속에서 문제를 수습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모험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과 과제는 크게 네 가지였다. △당내 계파 간 해묵은 갈등의 안정화와 원활한 해결 △대선 패배 이후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에서 어느 정도 정비된 당 시스템을 발판 삼아 여권과 민생 현안을 두고 벌이는 진검승부 △야권 내 대안세력인 안철수 진영과의 경쟁 △임기 내 치를 10월 재·보궐 선거와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의 승리가 그것이다.
리더십의 첫 번째 시험대였던 6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김한길 지도부는 ‘을을 위한 전쟁’을 선언하며 민생현안 선점에 사력을 다한다는 스탠스를 시사했다.
하지만 6월 임시국회는 그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국정원 대선개입 파문에 따른 국정조사 여부가 큰 이슈로 등장했고 연이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파문이 정국을 뒤엎었다. 이러한 정국 초기, 기자와 만난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당시 “김한길 지도부가 왜 지금껏 ‘을’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며 “여권에 절대 불리한 국정원 대선개입 파문이 터진 지금, 김한길 지도부는 공격력을 이쪽으로 집중시켜야 한다. 원래 김한길 대표는 평소 성격상 한 곳에 꽂히면 집중하는 스타일인데, 이 비상 정국에 여전히 그가 꽂힌 곳은 국정원이 아닌 ‘을’인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국정원 대선개입 파문이 이슈로 떠오른 정국 초기 이슈를 선점하고 전략을 구상해야 하는 당 지도부로써 대응이 다소 늦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문재인 의원
정치컨설턴트인 이재관 마레컴 대표는 “지금 정국을 덮고 있는 모든 이슈는 결국 지난 대선 패배와 관련된 것들이다. 아직까지 대한민국 정치판은 지난 대선 정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김한길 대표의 전략 미스를 지적하기도 한다. 정치컨설턴트 김대진 조원씨앤아이 대표는 “NLL 정국은 이미 문재인 의원을 비롯한 친노 진영이 주도하고 있다”며 “김한길 지도부는 아예 국정원 국정조사와 NLL 정국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국정원 국정조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지금처럼 분리대응을 하지 않고 어정쩡하게 나섰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미 주도권이 넘어간 NLL 정국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손을 잡고, 차라리 국정원 국정조사에 초점을 맞춰 분리 대응에 나서라는 주문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렇게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당 지도부에 대한 심한 우려감이 벌써부터 조성되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 김한길 지도부는 당 생명과 직결된 오는 10월 재·보선과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 특히 당 중진급 인사들 사이에서는 문재인 의원의 정국 주도에 대한 달갑지 않은 시선과 그와 반대로 입지가 축소되고 있는 당 지도부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박지원 의원은 “당 지도부가 데미지를 입으면 당이 정말 힘들어진다. 돕지 못하면 불만이 있어도 침묵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문재인 의원에 대해선 “너무 섣부르게 나섰다. 이긴 싸움을 왜 또 전쟁으로 몰고 가느냐”며 아쉬움을 표했다.
민주당의 한 원로급 의원은 “남재준도 그렇지만, 당 지도부도 거치지 않고 자기 입지를 위해 독자적으로 정국을 주도해 나간 문재인이 더 문제”라며 “남재준이고 문재인이고 다 주변생각 안하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앞으로 김한길 지도부가 당장 앞으로 다가온 재·보선은 어떻게 치를지가 걱정”이라며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한길 지도부에게 더 절망적인 것은 이러한 형국이 10월 재·보선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김대진 대표는 “안타깝지만 김한길 지도부의 불안한 입지는 10월 재·보선까지 계속될 것”이라며 “10월 재·보선 직전에 진행되는 9월 국정감사 역시 별다른 이슈가 떠오르지 않는 이상, 지금 이 정국의 연장선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또 여권은 물론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김한길 지도부가 약속한 기초의원 공천제 폐지 역시 합의가 쉽지 않는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야권 내 대안세력인 안철수 진영이 NLL 정국에서 함께 모습을 감췄다는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연 미스터리극 ‘김한길 실종사건’은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까. 우리는 김한길 대표가 전면에 나서는 걸 다시 볼 수 있는 것일까.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