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과 김종필 민자당 대표. 사진제공=대한매일
정치권에서 진정한 의미의 지방자치가 실현된 것은 1995년 3월 통합선거법 제정이었다. 통합선거법은 개별적으로 적용되던 대통령, 국회의원, 기초단체장, 지방의회 선거를 하나의 법으로 흡수·통합한 것이다. 통합선거법 시행 후 선거 비용을 나라에서 보전하면서 음성적으로 조성되던 선거자금이 획기적으로 줄기 시작했다. 통합선거법은 훗날 정치자금법과 공직선거법으로 명칭과 내용이 바뀌었지만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995년 지방선거는 통합선거법이 적용된 첫 번째 선거였다. 여야는 문민정부 출범 이전부터 지방자치에 따른 선거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했다. 판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여당의 열세로 기울었다. 민주자유당 내부에서는 “이제 여당 공천장 필요 없어졌다”, “지방자치는 선거 하지말자는 이야기”라는 말이 공공연히 오갔다. 한마디로 지방자치를 하면 정권이 사는 대신 정당은 망한다는 것이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지방자치는 본연의 의미를 잃고 점차 정쟁의 도구로 변질하기 시작했다. 통합선거법 제정이 마무리되자 여야는 행정구역 개편과 기초의회 정당공천 문제를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민자당에서는 읍면동을 없애고 시군구를 통합해 인구 100만~200만 명 규모의 광역 행정단위로 재편하는 2단계 행정개편안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서울분열론’도 들고 나왔다. 서울이 지방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하니 행정구역상 동서남북으로 나눠 사람을 뽑자는 것이었다. 다분히 선거를 의식한 논의들이었기에 청와대로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한 김종필 총재가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대한매일
YS가 기초의회 정당공천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일본의 영향이 컸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지방자치를 실시했지만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지방의회가 중앙정치에 강하게 예속돼 있었는데 똑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말자는 것이었다. 정략적으로 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지만 정치권은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야당인 민주당은 정당공천이 없으면 기초의회에 지방 토호들과 연계된 여권 쪽에 표가 몰려 지방자치의 실현이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민자당과 논의 끝에 기초의회 공천배제를 확정하려 하자 이를 ‘공천배제파동’이라 명명하며 국회 보이콧까지 선언하며 맞섰다. 급기야 청와대에서 아예 지방자치를 연기하려고 한다는 음모론마저 나왔다. 지방자치 실시에 대한 합의는 노태우 정부 4개 정당이 모두 입을 모은 데 따른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여야 대립이 심각해지자 YS는 여당이 주장한 행정구역 개편과 야당이 요구한 기초의회 정당공천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는 선에서 문제를 정리했다.
결과적으로 1995년 지방선거는 민자당의 참패로 귀결됐다. 당시 시대상황도 집권 여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단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로 촉발된 쌀 시장 개방의 여파가 여전했다. WTO(세계무역기구)체제 출범 이후 관세 철폐는 세계화에 발맞추는 과정이었지만 쌀 시장 개방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감은 그대로였다.
1995년 이명박 의원의 서울시장 후보 접수 모습. 당시 민자당에선 형식적인 경선을 거쳐 정원식 전 총리가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지만 결국 민주당 조순 후보에게 패했다. 사진제공=대한매일
지방선거 패배의 직접적 원인은 선거 직전인 1995년 2월 9일 김종필 민자당 대표(JP)의 탈당이었다. 당시 선거를 목전에 둔 민자당에서는 김종필 대표 체제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다. 세계화와 문민개혁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명분이었지만 간단히 말해 구세력이니 비켜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민주계의 요구가 집요했다. 민주계의 뜻이 곧 YS의 뜻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탓인지 YS와 민주계, JP의 공화계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YS는 JP와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정권을 유지하고 안정 속 개혁을 추진하는데 중요하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YS와 JP는 정치적 노선이 매우 달랐지만 궁합이 꽤 잘 맞았다. YS는 야당 시절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갈등 관계를 유지했지만 JP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탈당 직전 JP와의 만남 때 YS는 “이건 결코 내 뜻도 아니고 지금 당에서 너무 나가고 있다”며 이해를 구했다고 한다.
JP가 탈당한 이유는 민자당에 남아있으면 내각제 개헌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YS는 내각제 합의는 3당 합당의 근간이 되긴 했지만 민정계가 정략적인 이유로 합의 문서를 공개한 순간 그 합의는 깨졌기에 내각제는 국민의 동의를 얻은 상황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JP는 내각제 합의에 대한 불씨를 여전히 살려 놓고 있었던 것이다.
JP의 탈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돌풍은 정치권을 강타했다. 충청권은 말할 것도 없었고 TK(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민정계가 크게 선전했다. 선거가 끝나고 언론에서는 권력이 PK(부산·경남)의 민주계에서 다시 TK의 민정계로 넘어갔다는 분석마저 내놓았다. 집권 여당이 분열된 셈이니 예견된 참패였다고 할 것이다. 1995년 지방선거의 패배는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을 새삼 절감한 순간이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MB가 집요하게 경선 요구”
―1995년 지방선거 중 서울시장이 가장 뜨거웠을 것 같다.
“인구의 50% 가까이 모여 있고 대권으로 향할 수 있는 자리이니 당연할 것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특히 수도권 여론조사에 공을 들였는데 매번 민주당을 상대하기 쉽지 않겠다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민자당 후보였던 정원식 전 총리는 민주당 조순 후보보다 약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후보가 정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7년 대선 때 ‘9룡’이 난립했던 것처럼 1995년 서울시장 선거 역시 자천타천으로 후보가 난립했다. 당 밖에서는 이회창, 정원식 두 전직 총리와 고건, 박찬종 의원 등이 있었고 당내에서도 이세기 의원, 최병렬 당시 서울시장, 김덕룡 사무총장 등이 거론됐다.”
―김 교수가 특별히 마음에 둔 후보가 있었나.
“나는 반드시 경선을 거쳐 뽑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경선을 통한 컨벤션효과(정치 이벤트 직후 지지율이 상승하는 현상)가 상당하지 않나. 우리도 그런 그림을 통해 정당 지지율을 끌어 올리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 싶었다. 정원식 전 총리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경기도지사에 이인제 의원이 나왔으니 그에 맞는 젊고 개혁적 인물이 나와야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 당시에도 당내 경선을 하긴 했다.
“형식적으로 경선을 거쳤을 뿐 사실상 추대한 것이었다. 당 안에 후보가 너무 많다 보니 사전에 조정하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가겠다는 당내 우려가 컸다. 또 경선을 하면 파가 나뉘는 등 시끄러워질 것으로 생각해 추대로 간 것이 패착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다.
“나에게 끝까지 경선을 요구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14대 국회 전국구 의원으로 들어왔는데 1987년 대선에서 정주영 회장이 출마하자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그를 영입해 타격을 입히려는 목적이었다. 많은 서울시장 후보들 가운데 유일하게 경선에 참여한 이명박 의원이었지만 당시 당내 입지로는 정 전 총리와 싸움이 안 됐다.”
―결국 나중에 서울시장이 되고 대통령까지 당선됐다.
“하여튼 휴가 때 청남대까지 전화해 경선에 대해 물었을 정도로 패기가 넘치는 정치인이었다. 뭔가 큰일을 저지르겠구나 싶었는데 결국 대통령까지 됐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