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론 브란도는 동시대 할리우드 남녀 스타들과 화려한 성적 편력을 자랑했다.
동시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남성 스타들도 그의 파트너였다. 고향 선배인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비롯, ‘제2의 브란도’로 일컬어지던 폴 뉴먼이나 전형적인 헝크(큰 덩치의 섹시남)의 전형이었던 타이론 파워, 그리고 브란도의 추종자였던 제임스 딘…. <줄리어스 시저>(1953)에서 공연했던 영국의 위대한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인 존 길구드 경도 브란도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렇다면 말론 브란도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에서 공연했던 여배우 킴 헌터는 촬영 당시 브란도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헌터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가장 깊고 가장 어두운 비밀”이라며, 브란도는 자신이 영원히 마마보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브란도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매우 흡사하다. 클리프트도 자신을 압박하는 거대한 모성성에 의해 내면을 잠식당했던 것. 그들은 짧지만 강렬한 관계를 맺었는데, 브란도가 압도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브란도에게 첫 호모섹슈얼리티의 경험은, 알려진 바로는 19세 때였다고 한다. 1943년 매사추세츠 동남부의 프로빈스타운 해변. 젊은 브란도는 32세의 어느 희곡작가를 만난다. 그는 바로 브란도를 브로드웨이의 빅 스타로 만드는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작가였던 테네시 윌리엄스다. 그와의 강렬한 경험 이후 브란도는 수많은 여자들을 ‘후리게’ 되었다.
왼쪽부터 마릴린 먼로·비비언 리·제임스 딘·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한 모습.
브란도의 멘토이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프론트>(1954) 등의 영화로 브란도를 할리우드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엘리아 카잔 감독은 브란도가 ‘섹스 기계’였다고 말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촬영할 땐 상대역인 비비언 리는 물론, 그녀의 남편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와도 관계를 맺었다고 말했다. 마릴린 먼로와는 비밀리에 가명으로 결혼까지 했던 사이라고 밝혔다. 브란도의 첫 번째 아내였던 애너 카쉬피는 “똥이 파리를 유혹하듯 브란도는 여자를 유혹했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브란도에게 동성애는 그의 정체성 이전에 어떤 육체적 전략이었다는 점. 그의 에이전트였던 에디스 밴 클리브는 브란도가 당시 경쟁 관계였던 배우들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대신 그들을 유혹했다고 해석한다. 몽고메리 클리프트와도 그런 관계였고, 폴 뉴먼, 타이론 파워, 제임스 딘, 버트 랭커스터, 로렌스 올리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들을 유혹하는 과정에서 브란도는 어떤 죄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반대로 자신은 진정한 이성애자라고 확신하곤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여배우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고, 130킬로그램이 넘는 엄청난 비만 상태에 이르렀던 노년에도 할리우드 홍등가 최고의 콜걸이자 포주였던 하이디 플라이스와 성관계를 가지곤 했다.
말론 브란도에게 ‘섹슈얼한 관계’는 결코 일반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의외로 가볍게 여겼다. 1976년에 게리 캐리와 인터뷰에서 브란도는 이렇게 말했다. “동성애는 이젠 하나의 패션이다. 많은 남자들처럼 나도 동성애 경험이 있으며, 그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그러면서 농담을 덧붙였다. “하지만… 만약에 나와 잭 니컬슨이 게이 커플이라고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계속 그렇게 떠들게 놔두려고 한다. 니컬슨과의 관계는… 왠지 멋있을 거 같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