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지난 18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 씨가 운영하는 시공사 사옥을 압수수색해 비자금이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술품을 화물차로 옮기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이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선고금액 23조 300억 원, 미납금 22조 9460억 원),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자금을 관리한 김종은 전 신아원 회장(선고금액 1964억 원, 미납금 1962억 원)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액수다.
검찰은 장남 재국 씨, 차남 재용 씨, 장녀 효선 씨, 처남 이창석 씨, 동생 경환 씨 등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주거지 5곳과 도서출판 시공사, 허브빌리지, 부동산 개발회사 비엘에셋 등 일가와 관련한 업체 12곳도 압수수색했다. 17일에는 전 전 대통령 친인척 주거지 13곳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장남 재국 씨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시공사와 경기도 연천 허브빌리지 등에서 비밀창고 속에 보관된 미술품 수백 점을 발견했다. 검찰은 황동불상과 그림, 자수 등 미술품과 공예품 500여 점을 압수했고 운반을 위해 5톤 무진동 화물차량이 수차례 오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또한 검찰은 고 이대원·박수근 화백 등의 억대 미술품을 압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전 전 대통령 일가가 보유한 개인 재산 외에 자녀들이 운영하고 있는 업체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다.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이 자금 세탁과정을 거쳐 자녀들에게 수천억 원대 재산을 편법증여하고 이 돈이 사업 자금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장남 재국 씨와 차남 재용 씨는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뒤 재산을 빼돌리고 거액의 세금을 탈루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이 외사부 소속 검사들을 수사에 대거 투입한 것도 재산 국외도피 혐의와 역외 탈세 혐의를 밝히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며 미납 추징금 납부를 피해왔지만 자녀 등 일가 재산은 알려진 것만 2000억 원이 넘는 상황이다.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 씨는 도서출판 시공사 자산 290여억 원, 시공사 관련 부동산 500여억 원, 경기도 연천군 허브농원 250여억 원 등 총 1000억 원대 자산가로 알려졌다. 차남 재용 씨는 부동산 개발업체인 (주)비엘에셋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비엘에셋의 자산은 2011년 기준 427억여 원에 달한다. 삼남 재만 씨는 서울 한남동에 100억 원 상당의 빌딩, 미국 캘리포니아에 1000억 원대 포도농장을 소유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은 부인 이순자씨 명의로 돼 있으며 약 40여억 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가의 재산이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활용해 형성됐거나 이를 이용해 얻은 수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관련법에 따라 추징될 수 있다. 최근 개정된 ‘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일명 전두환 추징법)’은 범인이 아닌 사람이 범죄 정황을 알면서 취득한 불법재산과 그로부터 유래한 재산에 대해 강제집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장남 전재국 씨
이 같은 규정이 추가됨에 따라 이번 검찰의 전 전 대통령 본인의 자택뿐만 아니라 자녀 등 일가의 주거지와 사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이 가능했다. 그러나 검찰은 제3자가 불법재산이라는 정황을 알면서 취득한 경우에만 집행하고 문제된 재산이 불법재산이라는 점을 엄격히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해 역사상 유례없는 압류와 압수수색을 벌였지만 압수품과 전 전 대통령 비자금의 연관성을 밝혀내지 못할 경우 추징하지 못하고 반환해야 한다.
전 전 대통령 자택에서 압류한 미술품과 보석 등은 전 전 대통령 재산이라는 점에서 입증이 수월하겠지만 자녀와 친인척으로부터 압수한 재산에 대해서는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 상당한 험로가 예상된다.
또 재국 씨 등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제3자 이의 청구소송’을 제기하고 강제집행 절차를 정지시킬 경우 수사는 법적 공방으로 비화될 수 있다. 실제로 시공사와 허브빌리지, 비엘에셋 등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설립된 후 사업이 확대됐기 때문에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추징 범위를 밝히는 것이 쉽지 않다.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은 “불법재산이 불법재산 외의 재산과 합해진 경우는 불법재산 비율에 해당하는 부분을 몰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압수물 분석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압수 미술품 등의 구입 경로를 역 추적해 구입에 쓰인 종잣돈을 밝혀내겠다는 것이다. 또 전 전 대통령이 비자금을 숨기기 위해 가족과 친인척 명의로 차명계좌를 운영하고 보험 계약을 맺은 사실이 있는지 확인 중이다. 검찰은 최근 보험사 5곳에 전 전 대통령 친인척들이 가입한 보험계약 정보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전 전 대통령 일가 10여 명과 측근 20여 명을 출국금지했다. 검찰은 장남 재국 씨와 차남 재용 씨, 재국 씨의 미술사업 관련 사업본부장 전 아무개 씨, 재용 씨의 친구 류 아무개 씨 등이 전 전 대통령 차명 재산관리의 핵심인물일 것으로 보고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이를 놓고 검찰 안팎에서는 검찰이 전 전 대통령 자녀에 대한 수사 ‘카드’로 전 전 대통령을 압박하고 미납 추징금 자진 납부를 유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검찰이 지난 2004년 차남 재용 씨를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하자 어머니 이순자 씨가 추징금 130억 원을 대신 납부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특별수사팀 관계자는 “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에 압박을 느껴서 대신 납부할 사람이 아니다”라며 “정상적인 수사절차를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압수물 분석을 마치는 대로 장남 재국 씨 등 관련자를 줄소환할 방침이다. 검찰은 미술품 구입과 사업체 운영에 들어간 종잣돈의 출처를 집중적으로 캐물을 계획이다. 또 미술품과 공예품은 원작자와 이를 유통시킨 화랑·갤러리 관계자들을 불러 거래 시기와 방식 등을 확인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전 전 대통령 일가와 친인척이 갖고 있는 부동산, 금융자산 등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국세청과 금융정보분석원(FIU)의 협조도 요청할 예정이다. 해외 재산과 금융거래 내역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에 사법공조를 요청해야 하는 문제도 남아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수십 년간 섞여버린 개인재산과 불법재산을 추적하고 분류하는 것이 수사의 포인트”라며 “대기업 비자금 수사보다 더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