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1988년 총선 때부터 기회가 있었다. 1987년 대선 패배 이후 아버지 YS는 ‘주먹구구식으로 정당을 운영해서는 안 되겠다. 과학적인 운영이 필요하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마침 내가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들어 1988년 총선 황색바람을 예견하면서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월경 ‘내가 언제까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부산 지역 출마를 권유했다. 무주공산인 곳을 거론했으면 당선은 떼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누군가 버티고 있는 곳이라 당내 교통정리가 안됐다. 그때부터 정치권 입문이 꼬이기 시작했다.”
―1992년 14대 총선 때도 권유가 있었나.
“YS가 대선에 나서면 지역구인 부산 서구가 비게 되니 내가 이어 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YS도 이를 허락하고 굳게 약속까지 했는데 3당 합당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3당 합당 이후 화합의 의미로 본인 지역구를 민정계에 넘겨줬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는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아 내심 서운했다.”
―15대 총선은 문민정부였기에 나서지 못했겠다.
“아니다. 솔직히 나가려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거제에 출마를 준비했다. 그러나 공천 탈락이 유력했던 현역 의원이 끝까지 양보를 안했다. 결국 어부지리로 김기춘 법무장관에게 지역구가 넘어갔다.”
―만일 13대 국회에 입성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이었겠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이후 계속 당선됐다면 7선이다. 당 대표, 국회의장 등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렸을 거다. 문민정부 때는 당 소속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직함을 갖고 활동한 것이 유엔한국청년협회장이었다. 총선 이후 낙동강 오리알이 된 나에게 외무부에서 제안한 자리인데 원래 활동을 안 하는 단체였다. 문민정부 당시 김현철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