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직장인 K 씨(여·27)는 며칠 전 택배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민망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당시에는 괜스레 얼굴이 절로 벌게졌다고.
“작은 무역 사무실이라 택배가 오면 우르르 모여서 뭐냐고 물어봐요. 최신 IT 기기를 주문한 사람들이나 옷을 구입한 동료들은 받자마자 한 차례 ‘물품 시연회’를 하곤 하죠. 그런데 아는 동생이 제 생일이라고 이것저것 저에게 꼭 필요한 물품만 담아서 일종의 종합선물세트를 만들어 택배로 보냈다는 거예요. 택배가 도착하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어요. 점심 먹고 다들 차 한잔 마시고 있는데 드디어 택배가 왔죠. 무겁지는 않았지만 제법 부피가 있어서 은근 우쭐대며 개봉하자마자 순간적으로 상자를 닫았어요. 남자직원 여자직원 구분 없이 다들 상자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는데 생리대가 종류별로 한 가득인 거예요. 너무 깜짝 놀랐어요.”
K 씨는 마음속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의연하게 대처하려 했지만 순간 저도 모르게 상자를 확 닫아버려 더 창피했다고. 그는 “생리대 밑에 기초 화장품, 과자, 사무용품 등 정말 알짜 선물들이 들어 있었지만 그 부분은 집에서 혼자 열어봤다”며 “동료 여직원들은 아직도 슬슬 놀린다”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사실 창피할 것까진 없지만 미혼 입장에선 다소 꺼려지는 물품도 있다. 산후조리원에 있는 언니를 대신해 회사에서 택배를 받은 Y 씨(여·28)는 택배를 받고 민망했던 경험이 있다.
“규모가 크지 않은 IT 관련 회사라 제가 맡은 디자인 파트를 제외하곤 거의 남자직원인데요. 하루는 제 앞으로 택배가 왔어요. 흔치 않은 일인 데다 크기가 꽤 크더라고요. 당연히 관심이 모아졌죠. 저도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받고 열어봤는데 생긴 것도 요상했어요. 중고제품이라 박스도 없이 물품만 있어서 다 같이 이게 뭐지, 하면서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는데 한 남자직원이 설명서를 발견해서 보더니 읽고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더군요. 이상해서 보니까 작은 설명서에 큼지막한 글씨로 ‘유방에서 모유를 흡입하는 기구’라고 쓰여 있었어요. 유축기였는데 몰랐던 거예요.”
Y 씨는 본인이 쓰는 물품도 아니고 어찌 보면 정말 좋은 제품이지만 순간적으로 미혼 남자직원들 앞에서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바로 언니한테 전화해 일부러 조금 큰 목소리로 ‘택배 잘 받아뒀다’고 얘기했지만 괜히 같이 본 남자직원이나 본인이나 볼 빨개지는 경험이었다”고 전했다.
회사에서 가끔 받는 택배도 관심의 대상이지만 지나치게 많이 받는 택배에도 시선이 쏠린다. 자칭 알뜰족인 J 씨(여·25)는 화장품 마니아. 그렇다고 버는 족족 소비하는 건 아니지만 종종 오해를 산단다.
“화장품 사이트에서 사용 후기를 써서 당첨되면 화장품을 주거든요. 테스터 자격도 주어지면 샘플도 보내주죠. 그런 인터넷 사이트가 굉장히 많아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응모해요. 물론 거의 다 무료죠. 근데 그 물품들이 수시로 오니까 슬슬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하루에 두 번씩 올 때도 있거든요. 한번은 상사가 뼈있는 농담까지 했죠. ‘뭘 그리 많이 사나, 월급 받아 쇼핑만 하나보다’라고 하는데 된장녀 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이 살짝 나빴어요.”
“일일이 설명하기도 구차스럽고 택배가 많이 오니까 일은 안 하고 쇼핑만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는 J 씨는 사무실까지 택배가 오지 않게 경비실에 맡겨달라고 주문할 때부터 요구하는 것으로 나름의 해결책을 찾았다. J 씨처럼 그나마 내 물건이면 괜찮다. ‘남의 물건’이 사무실에 택배로 쏟아져 온다면? 건축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P 씨(35)는 아내의 쇼핑 취미로 난처한 입장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아내가 집으로 택배를 받으면 어머니 눈치가 보인다고 자꾸 제 사무실로 배송 받는 거예요. 어쩔 수 없었죠. 근데 그 횟수가 문제예요. 일주일에 두 번은 기본이고 많으면 하루에 한 번꼴로 택배가 옵니다. 이젠 사무실에 택배기사가 오면 알아서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아내는 싼 제품이기 때문에 과소비가 아니니 문제없다고 하는데 사무실에서 택배 받는 제 입장은 생각도 안 하는 거죠. 화장품이랑 옷은 기본이고 가끔 속옷도 배달 오는데 누가 볼까봐 은근 신경 쓰입니다. 아내한테 사정해 봐도 소용이 없네요.”
직장 내에서 양다리를 걸치다가 택배 때문에 딱 걸린 경우도 있다. 여자 친구 선물을 주문했던 N 씨(29)의 경우다.
“입사 초기 어리바리했을 때 매장 직원 두 명과 동시에 만났었어요. 한 명은 연상이고 한 명은 연하였는데 대형 매장에서 서로 다른 파트에 근무하니 전혀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죠. 한 번은 연하 여자친구 생일선물로 속옷을 주문하고 사무실에서 제가 직접 받았는데 같은 사무실에 있던 여직원이 본 겁니다. 누가 봐도 택배 상자가 여자 속옷 이겠구나 하겠더라고요. 요새는 모르게 포장해 준다던데 몇 년 전이라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죠. 그런데 하필이면 연상 여자친구를 아는 직원이 상자를 봤고, 그뒤 속옷 받았느냐고 물어서 결국 들통났습니다. 연상 여자친구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다그치는데 무서워서 연하 여자친구는 바로 정리했어요.”
최근 많은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택배를 받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제품 판매자들도 소비자를 배려하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성인용품을 시켜도 상자에는 어엿한 ‘○○회사, 잡화’로 표기된다고. 대형 쇼핑몰 배송 관계자는 “요새는 속옷이나 빅 사이즈 의류, 위생용품이나 성인용품 등 주로 인터넷으로 구입하는 물품들이 철저하게 포장돼 나간다”며 “이제 비밀배송은 판매자 기본사항이라 회사에서 택배를 받아 민망할 일은 훨씬 줄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