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 원내대표가 청와대의 뜻에 반해 ‘NLL 대화록 공방’을 너무 오래 끌고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박대통령 처지에서는 ‘경제+일자리+물가’ 측면에서 국민으로부터 점수를 따야 한다. 그런데 국정원 정치개입 국정조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진실공방에 완전히 묻혀버려 국정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비치는 것이 불만일 것이다. 벌써 몇 개월째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인가. 그래서 박 대통령이 신호를 몇 차례 보냈는데도 여권의 안테나가 이를 캐치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파 수신이 안 된 것이다.”
지난 7월 15일 박 대통령은 홍익표 당시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귀태(鬼胎·태어나선 안 될 사람)에 빗대자 “말은 사람의 인격”이라고 한 뒤 “서로 상생하고 품격 높은 정치시대를 열기 바란다”고 했다. 이 속에 소모적인 NLL·국정원 정국을 넘어서자는 복선이 깔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권이 알아듣지 못하자 한광옥 국민통합위원장이 24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가지고 정치권이 정쟁을 거듭하는 것이 안타깝다.
여야가 서해 북방한계선을 존중하고 굳건히 수호한다는 데 합의하고 갈등을 멈춰라”라고 나섰다. 앞서 23일에는 김재원 새누리당 전략기획본부장이 “끝도 없는 대화록 공방에 국민이 피곤하다. 박 대통령 국정 수행도 많은 지장을 받고 있다. 정치권은 민생 문제로 돌아가자”고 했다. 오히려 김 의원이 청와대의 ‘여의도 파출소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있은 지 열흘 뒤인 25일에야 새누리당이 ‘박심’을 간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실종을 폐기와 은닉이라는 범죄로 보고 검찰 수사를 요구한 것이다. 정치권 공방을 거두고 검찰 손에 맡김으로써 민주당의 특검 요구를 차단하는 동시에 ‘민생으로의’ 출구전략을 세웠다는 것. 이는 다음날인 26일 최 원내대표의 긴급 기자간담회에서 확인됐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제부터 새누리당은 NLL 관련 정쟁을 일체 중단하겠다”며 “검찰 수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민생 현장으로 달려가겠다”고 선언했다.
정치권 소식을 모으는 한 정보통은 이런 말을 했다. “박 대통령이 이제 후퇴하라고 북을 친 지가 언젠데 열흘 이상이나 까먹으면서 청와대가 진노했다는 말이 있었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최경환 원내대표의 정무 감각에 크게 실망했다는 말도 있다.”
여권 내부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새누리당은 이번 NLL 정국에서 얻을 만큼 얻었기 때문에 퇴로를 열어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많다.
정권을 재창출했고, 민주당과 그 안팎의 친노무현 세력에게 충분한 타격을 가했다는 논리를 들고 있다. 다만 민주당이 요구하는 남북정상회담 전후의 조치들에 대해선 국민적 궁금증이 있으니 여야가 함께 열람해야 한다는 주장도 조금씩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최경환 원내대표가 반대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당내 혼란이 야기된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번 NLL 정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정치인으로 최 원내대표가 꼽히기까지 한다. 이와 관련한 정치권 관계자들의 이야기들이다.
“오히려 이번 판에서 두각을 보인 인물은 서상기 의원이다. 그가 주인공이 됐다. 그런데 최 원내대표는 전혀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고, 청와대와의 교감도 일정 정도 어긋났다.”(한 정치권 인사)
“오전에 회의를 하는데 최 원내대표 때문에 자꾸 중단된다. 문자메시지 수신과 전화통화로 회의의 흐름이 끊기는데다 담배 시간도 너무 잦다. 여당 원내대표로서 무게감을 보여야 하는데 너무 초조해 보인다.”(고위 당직자)
“NLL 문제가 촉발된 뒤로부터 오늘까지 몇 개월이 그냥 흘렀다. 청와대는 경제에 올인해 가계 주름살을 펴야 하는데 공기업 인사조차 않고 있다. 원내대표라면 이런 것들을 지적해야 한다. 당·청 간 건전한 견제관계를 형성해야 최 원내대표를 향한 신뢰가 피어난다. 경제는 수치지만 느낌도 중요하다. 국민에게 그런 느낌을 못 주고 있다.”(원내 관계자)
한쪽에서는 최 원내대표의 수(手)가 너무 빤해서 원내 전략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지난 16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서울시가 보육비 부족을 박근혜 정부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겨눴을 때다. 여권 내부에서도 박 시장을 때리기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차기 서울시장 여권 후보들이 불리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했다. 여권 전략 관계자의 말이다.
“사초의 증발 경위 조사의 객관성, 공정성,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지만, 원내대표실에 닿지 않는 것인지 닿았는데도 무시한 것인지 가타부타 말이 없다. 국정원과 검찰은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데 수사는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꼴이 된다. 그런데 이런 아이디어를 무시 일변도로 갈 경우엔 전략에 구멍이 생기거나 바닥이 드러나고 만다.”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추석을 앞두고 “추석 밥상에 올릴 이야기 거리를 찾아야 하는 판에 여전히 개성공단, 북방한계선, 국정원 등 안보 이슈뿐이다. 안보 이슈를 오래 끌면 어느 한 쪽이 승리한다기보다 피로감에 국민들은 여야 모두에게 낙제점을 줄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여권 내부에서부터 일고 있다.
일각에선 ‘최경환 당대표론’은 이번 NLL 정국에서 물 건너갔다는 말을 한다. 당권에 가장 가까이 있는 김무성 의원의 대항마로 친박 쪽에서는 최 원내대표가 적격이란 말을 했다. 김 의원은 큰형님 이미지를 남겼지만, 최 원내대표는 친박 내에서조차 비토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첫 인사에서 최 원내대표를 기용하지 않은 것은 여의도와의 원거리 정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였고, 임기 중반 힘이 빠질 때 지원해 달란 뜻도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원내대표를 맡은 지 두 달이 안 돼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최 원내대표로선 앞으로의 한 발 한 발이 일종의 실험대와 같아진 셈이다. 그것도 외줄타기 같은.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