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이 무기명채권을 통한 부동산 거래로 비자금을 세탁한 정황을 <일요신문>이 포착했다. 일요신문 DB
하지만 정부의 의도와 달리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채권자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데다 국세청도 채권발행 당시 매입자금의 출처에 대해 세무조사를 하지 않기로 한 덕분에 비자금 은닉, 탈세, 불법정치자금으로 쓰이는 등의 부작용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 ‘비자금의 달인’ 전두환 전 대통령(82)도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비자금 관리수단으로 1400억 원에 달하는 무기명채권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전 전 대통령의 ‘뛰어난 관리능력’ 덕분에 비자금을 추적하던 검찰은 매번 무기명채권 앞에서 무너졌다. 특히 지난 2004년 차남 재용 씨(49)의 조세포탈 혐의에 대한 조사 당시 의문의 무기명채권을 상당수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통을 밝혀내는 데는 실패한 바 있다. 이후 종적을 감췄던 전 전 대통령의 무기명채권은 10여 년 만에 또 다시 차남 재용 씨에 의해 꼬리가 밟혔다. 일명 ‘전두환 추징법(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난달 27일 재용 씨는 상당히 바쁜 하루를 보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서울 이태원동의 고급빌라 ‘준아트빌’ 두 채를 자녀들이 다니는 유치원 학부모 노 아무개 씨(여·37)에게 급매한 것. 현재 해당 빌라 펜트하우스에는 재용 씨가 거주하고 있기도 하다.
매매 시기만으로도 의심을 받기 충분하나 거래내역도 일반적이지 않다. 노 씨는 각각 14억, 16억 원에 빌라를 사들였는데 인근 공인중개사의 말에 따르면 시가에 비해 낮은 가격이라고 한다. 그는 “준아트빌은 보통 17억~18억 원대에 매매되며 워낙 거래가 드문 건물이라 최고 20억 원 이상 받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검찰은 준아트빌 매매 과정에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개입돼 있는 것으로 보고 압류조치를 취한 상태다. 지난 2004년 재용 씨의 조세포탈 사건 수사 때 드러난 외할아버지 이규동 씨로부터 받은 167억 500만 원 국민주택채권 중 20억 원가량이 빌라의 계약금 및 중도금 납부에 사용됐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재판부는 167억 500만 원의 채권 중 73억 5500만 원만 전두환 비자금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재용 씨 측은 외할아버지에게 받은 채권이 종자돈으로 활용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불법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다는 입장이다. 자금 문제는 2004년 조사에서 다 해명이 된 부분이고 재산을 은닉할 목적은 없었다는 것. 급히 빌라를 매매한 것도 이를 담보로 저축은행 9곳으로부터 250억 원을 빌려 썼는데 독촉이 시작돼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이미 매매를 통해 얻은 수익 30억 원도 저축은행 9곳이 나눠서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검찰 관계자들이 7월 16일 전두환 전 대통령 연희동 자택에서 압류 절차를 진행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과의 부동산 거래 대부분은 무기명채권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는 “측근들을 동원해 믿을 만한 건물주를 찾아내면 곧바로 돈세탁에 돌입했다. 시가보다 비싼 가격에 건물을 사겠다며 접근한 뒤 무기명채권으로 거래할 것을 요구했는데 뒷돈을 챙길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줬다. 10억 짜리 건물이면 15억 원어치의 무기명채권을 주면서 알아서 현금화하라는 방식이었다. 얼마를 남겨 먹든 전 전 대통령은 상관하지 않았다”며 “투자가치가 있는 건물은 그렇게 거래를 끝내고 현금이 필요할 때는 재매매를 이용했다. 자신이 채권을 주고 사들인 부동산을 구매자로부터 현금을 받고 되파는 방식이었다. 이럴 경우 건물주는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돈을 남기고 수수료까지 받아 이중으로 이득을 본 셈이고, 전 전 대통령은 제3자를 통해 거액의 채권을 사채시장에서 현금화해 편리했던 것”라고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의 사채를 통한 부동산 밀거래 방식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예를들면 200억 원어치의 채권을 주고 100억 원대의 부동산을 산 뒤 구매자에게는 채권 200억 원을 현금화해 그 차익을 모두 가져가게 한 것과 같다. 구매자는 능력에 따라 채권을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액수의 차액을 남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은 언뜻 보면 전 전 대통령이 손해를 보고 돈세탁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무기명채권을 현금화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무기명채권 중개업을 했던 한 관계자는 “보통 검은 돈이라고 해도 만기가 지나지 않은 무기명채권은 사채시장에서 손쉽게 현금화가 된다. 소정의 수수료만 쥐어주면 하루 만에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데 누가 복잡하게 부동산 거래를 이용하겠느냐”면서 “전 전 대통령의 경우 워낙 거액의 채권을 가지고 있는 데다 검찰의 주목을 받고 있어 한꺼번에 사채시장에서 풀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본인이 직접 채권을 사채시장에서 현금화할 경우 자금 단위도 크고 보안이 샐 염려가 많기 때문에 채권을 잘개 쪼개 제3자에게 현금화하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또한 앞서의 관계자는 “어떻게 보면 부동산을 이용한 채권 세탁은 전 전 대통령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시가보다 비싼 가격으로 건물을 매입해야 될 뿐만 아니라 상당 금액의 수수료도 챙겨줘야 하니 어지간한 자산가가 아니면 시도할 수도 없는 방식이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의 경우 천문학적인 액수의 채권을 쟁여놓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소문엔 만기가 지난 채권을 부동산을 통해 세탁했다는 말도 들린다. 만기가 지난 채권은 금융당국의 추적을 받기 쉬워 사채시장에서도 꺼리기에 현금화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의 수많은 심복들은 ‘각하’의 말이라면 만기가 지난 채권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의 칼날이 전 전 대통령의 이런 채권을 통한 부동산 밀거래 수법도 파헤칠 만큼 예리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