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비자금 사건과 관련 검찰에 구속되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장의 예금계좌 사본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비자금의 실체가 공개된 순간이었다. 박 의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4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한 뒤 이를 100억 단위로 쪼개 여러 은행에 차명으로 예치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 달 뒤인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격 구속됐다.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박 의원의 폭로가 일종의 해프닝에 그칠 것으로 봤던 모양이다. 당시 강삼재 민자당 사무총장은 처음에 “박 의원이 폭로한 돈은 사채시장의 검은 돈일 가능성이 크다. 야당이 헛발질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당사자인 노태우 씨는 “수사로 억울함을 밝혀 달라”고 읍소했다.
이 느긋한 반응은 박 의원과 같은 주장이 이미 언론을 통해 나온 적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폭로가 있기 두 달 전, 한 일간지에 ‘전직 대통령 중 한사람 4000억 비자금’이란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말실수를 한 것이 그대로 실린 것이었다. 이후 서 장관은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정가에 떠도는 ‘카더라 통신’을 사석에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밝혔다. 뒤늦은 해명이었다.
그러고 보면 ‘4000억 원’이란 액수는 여권에서 먼저 나왔던 셈이다. 이 때문에 박계동 의원의 폭로가 청와대와 연관됐을 것이라는 의심도 있었다. 야당 초선 의원의 폭로라기엔 증거가 너무나 명확해 청와대가 민주계 세력을 키우기 위해 역으로 정보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뒤에 박 의원과 예금계좌 주인이 고교 동창 사이였고 그가 직접 전해줬다는 인터뷰까지 나왔지만 정치권은 ‘청와대 연관설’을 더 믿고 싶어 했다.
당내 사정(事情)이야 어떻든 노태우 비자금 수사는 문민정부 사정(司正)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미 임기 초반 슬롯머신 사건, 율곡비리 감사 등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문민정부 검찰이 다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미 검찰은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두 대통령이 그저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나 치러 다니는 수준으로 생각했지, 설마 수천억 원씩이나 되는 비자금을 쌓아두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폭로 소식을 접한 YS 역시 “이건 비자금이 아니라 부정축재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검찰 수사는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11월 8일, 검찰은 현대 정주영, 삼성 이건희, LG 구자경, 대우 김우중, 롯데 신격호, 동아 최원석, 6명의 총수를 한꺼번에 소환했다. 어느 정권의 검찰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각 그룹에서는 대검찰청과 시청 인근 호텔 등에 비밀팀을 꾸려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대응했지만 검찰은 거침없이 6공화국 지도자의 부정축재 경위를 밝혀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보도를 보면 이들은 재벌그룹을 규모에 따라 4등급으로 분류해 자금을 걷었다. A 그룹은 300억 원 이상, B 그룹은 200억 원, C 그룹은 150억 원, D 그룹은 100억 원 전후였다고 한다. 미원그룹(현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은 “일국의 원수인 대통령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 20억 원을 주머니에 넣고 청와대 춘추관에서 혼자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불과 20년여 전에 있었던 일이다.
1995년 11월 1일 열린 노태우 전 태통령 비자금 의혹 관련 시위. 일요신문 DB
선거가 끝나고 남은 돈은 정당 운영이나 다음 선거를 위해 쓰였다. 일부는 엉뚱한 일을 꾸미기도 했다. 1992년 대선 직전, 김복동 박태준 박철언 의원 등 6공 세력을 중심으로 “도저히 이 상태로는 대선에서 이길 수 없다. YS를 믿을 수 없다”며 독자적으로 후보를 세울 움직임이 있었고, 1995년 지방선거 직후에는 TK(대구·경북) 세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당을 세우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누군가의 자금 지원이 없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초원복집 사건을 떠올리게도 한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YS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지지 모임들이 열리곤 했다. 초원복집의 모임도 매한가지였다. YS는 부적절한 모임을 주도한 김기춘 법무장관에게 “선거가 잘 흘러가고 있는데 아군이 재를 뿌리면 되겠느냐”며 진노했다.
초원복집 사건은 결과적으로 상대 캠프의 불법 도청 문제가 이슈가 됐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이루어진 섣부른 폭로가 역풍을 맞은 것이다. 상대 캠프의 도청으로 인해 영남이 YS 쪽으로 결집했듯이 노태우 비자금 사건 역시 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초강수로 이어지면서 이듬해 총선에서 승리를 안겨 준 셈이었다.
폭로는 또 다른 폭로를 낳기도 한다. 박계동 의원의 폭로 이후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나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20억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검찰 수사가 들어가게 되면 어차피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전직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YS에게도 덧씌우고 싶었던 것일까. 실제로 사람들은 “DJ가 20억 원을 받았으면 YS는 최소 200억 원은 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고 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YS가 맞장구쳤다면 정권은 수렁 속으로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폭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노태우 씨는 회고록에서 “YS에 수천억 원의 대선자금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YS가 대통령 후보를 만들어 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찌 되었건 검찰 수사 때 명명백백히 따지지 않고 뒤늦게 YS가 자신과 같은 비자금을 조성한 것처럼 말한 것은 부적절한 처사였다. YS는 퇴임 이후 노 씨에 대해 특별히 나쁜 감정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
1992년 대선자금에 관해 내가 YS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다. 솔직히 대선 직전 YS의 요구로 당을 떠났던 노태우 씨가 그런 액수를 지원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분명한 것은 1992년 대선이 끝나고 YS는 대선자금이 어떻게 운용돼 왔는지를 알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정치자금 수수 근절을 선언하고 통합선거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제 대통령 통치자금이라는 것은 없어졌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자금을 개인적으로 썼을 경우 어떤 말로를 겪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YS가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현재까지도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퇴임 후 YS 품위유지도 쉽지 않아”
김영삼 전 대통령 상도동 자택. 사진제공=경향신문
―두 전직 대통령은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이 다들 떵떵 거리며 살았다. 그에 비하면 YS는 초라한 수준이다. 대지 100평의 상도동 자택이 재산의 전부다.”
―상도동과 DJ의 동교동은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동교동과 비교해 봐도 우리가 더 초라하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은 자택에 청와대 못지않게 집무실을 차려 놓고 손님도 맞고 하는데 상도동은 그런 공간도 없다. 10명이 넘으면 앉을 자리가 없고 신년하례 때 손님이 몰리면 추운 마당에 나와 떡국을 나눠먹어야 할 정도다. 한 번씩 상도동에 가면 너무하다 싶은 때가 있다.”
―대신 대통령 연금이 있지 않나.
“연금이 나오는데 뭐가 문제냐 싶을 수 있지만 챙겨야 할 식구도 많고 경조사도 끊이지 않는다. 경호 비용 역시 나라에서 모든 걸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YS가 바깥출입이 드문 것도 어디 나가면 다 돈이 들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품위유지도 쉽지 않다.”
―믿을 수 없다.
“해외여행 한번 나가기도 버겁다. 가끔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초대를 받기도 하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체재비가 나오느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저쪽에서 난색을 표하고 당황해 한다.”
―체재비 문제로 초청이 취소된 적도 있었나.
“있었다. 그 이상은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아서 이야기 못하겠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