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끌리는 아름다운 그림은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림 앞에서 젊은이들이 속삭인다. 쟤가 고갱의 연인 ‘파우라’인가 봐. 사람들은 타히티 시절 그림 속에서 고갱의 연인이었던 어린 파우라를 찾으려한다. 헤세가 <지와 사랑>에서 그의 마음 속 예술가 골드문트를 통해 말했다.
“훌륭한 예술품의 원형은 실존적인 인물이 아니야. 그것이 동기가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원형은 살과 피가 아니고 정신이야. 그것은 예술가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형상이지.”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에게 압도된 것은 고갱의 연인이었기 때문도 아니고, 성형외과 의사들이 기준으로 삼을 만한 미모여서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연 속에서 다져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건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옷을 입고 있으나 자연에 속해 있다. 머리에 꽃을 꽂은 맨발의 여인들은 모두 자연의 품속에서 놀고 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과일은 그녀가 직접 딴, 그녀들의 일상일 것이었다. 거기엔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 있었다. 그것은 자연, 자연이다.
고갱의 낙원, 하면 역시 타히티 시절 이후다. 고갱이 중년에 접어들면서 그림을 시작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잘 먹고 잘 살다가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고 갑자기 직장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지금껏 세상에서 의지처가 되었던 모든 것을 등진 것이다. 고갱은 왜 훌훌 털고 타히티로 들어갔을까? 아마 그럭저럭 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럭저럭 사회에 적응하며 산다.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을 내재화하면서 피상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잘 먹고 잘 살아도 늘 허기진 느낌, 도시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죄수 같은 느낌, 그 느낌 속에서 숨 쉬는 직관의 불씨를 살리는 사람들 말이다.
분명 고갱이 그린 타히티는 ‘고갱’의 타히티이지 ‘타히티’ 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히티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사람은 자기만의 언어, 자기만의 세계를 발견하고 아낀다. 거기서도 어설프게 흘러들어간 문명은 실망스럽고, 몸은 병들고, 가난은 계속되었어도 거기선 맨발로 걸을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심장은 언제 뛰는가?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