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관계자들이 지난 7월 16일 전두환 전 대통령 연희동 자택에서 압류 절차를 마친 뒤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전 전 대통령 측이 수사기록 열람을 신청하게 된 주된 이유는 5공 당시 기업으로부터 거둬들여 추징금으로 선고된 2205억 원의 사용처를 밝히겠다는 것이다. 즉 이미 그 돈은 그 당시 ‘정치자금’으로 거의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은 재산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취지다. 하지만 그 속내는 조금 다를 것이라고 예견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 당시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장을 지낸 최환 변호사(70)는 “한 마디로 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일을 꾸미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재판이 진행 중인 경우에야 모르지만 재판이 끝난 후 한참 과거의 수사기록을 다시 열람하겠다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최 변호사는 “검찰에서는 수사기록을 내줄 의무가 사실상 없다”며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열람을 제기한 것은 사실상 현 시국을 돌파해보려는 ‘물타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전 전 대통령 측의 열람 신청 당시 “내줄 수 있는 자료와 내줄 수 없는 자료를 검토해 보겠다”는 검찰의 입장이 조금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법리적으로 따져 봐도 굳이 내줄 필요가 없다는 내부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대검찰청 예규 ‘사건기록 열람등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 5조 2항’이 거론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5조 2항에 따르면 ‘수사기관의 내부 문서는 등사, 열람의 허용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1995~6년 비자금 수사 당시 수사기록을 전 전 대통령 측이 벌써 가져갔다는 얘기도 나온다. 최 변호사는 “당시 전 전 대통령 측의 변호인단이 10명 정도 됐다. 그 사람들이 수사기록과 관련한 것은 모두 열람하거나 복사해 가져갔다”라고 전했다. 당시 수사기록은 10만여 쪽이 넘는 분량으로 96년 5차 공판에는 1톤 트럭에 실어 옮겨갈 정도로 방대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열람 신청의 시기나 그 방대한 분량을 고려해 볼 때 전 전 대통령 측의 열람·등사 신청 의도는 검찰 수사 전환을 앞두고 불리한 상황을 돌파해보려는 하나의 꼼수가 아니겠느냐는 분석이다.
한편 정 변호사가 수사기록 열람·등사 신청을 한 바로 다음 날인 지난 6일,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민정기 전 비서관은 주요 언론사에게 ‘보도 참고 자료’를 배포하며 전 전 대통령 측의 입장 발표를 이어갔다. 민 전 비서관은 보도 참고 자료를 통해 “전 전 대통령 일가가 지쳐가고 있으며, 처남과 자녀들의 사업체는 장부란 장부는 모두 압수되어서 경영에 차질을 빚고 있다”라고 전 전 대통령 일가의 근황을 전했다. 이밖에 전 전 대통령의 취임 이전 재산, 전 전 대통령의 자금 관리, 전 전 대통령을 향한 언론보도에 대한 입장 등을 나타냈다. 이중 가장 중심이 된 부분은 바로 ‘전 전 대통령의 취임 이전 재산과 자금 관리’ 부분이다. 특히 보도 참고 자료에 언급된 “전 전 대통령이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은 거의 다 정치자금이나 통치자금으로 썼다”는 주장은 정 변호사가 수사기록을 열람·등사 신청한 목적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전 전 대통령은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정말 모두 정치자금으로 사용한 것일까. 이에 대해 최 변호사는 “당시 수사는 전 전 대통령 측이 주장하는 민정당 정치 자금, 통치 자금 등을 모두 공적 자금으로 감안해 기소 과정에서 빼주었다. 한 마디로 2205억 원은 통치 자금을 제외한 순수한 뇌물 수수 금액”이라며 “수사 1단계에서는 전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과 뇌물 총액을 파악해 공소제기를 했는데 그 금액이 대략 ‘4000~5000억 원’ 정도 됐을 것이다. 여기서 정치자금을 감안해 다음 수사 단계에서 2205억 원으로 줄여준 것인데 이를 정치자금으로 썼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오히려 당시 전 전 대통령은 2205억 원을 납부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라고 전했다.
전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기업으로부터 9000억 원대의 통치자금을 걷어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전 전 대통령이 재임할 당시에는 ‘정치자금 기탁금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시기라 기업이 후원하고 싶은 정당이 있다면 선관위에 후원금을 기탁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이에 집권여당인 민정당은 500억여 원에 이르는 정치자금을 독식해 야당으로부터 “불공평하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 측 주장대로라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 정치자금으로 들어간 셈이다. 최 변호사는 “당시 전 전 대통령의 정치 자금 흐름도 2단계 수사를 통해 추적하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좌천되어 이를 진행하지 못했다.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지만 2205억 원에 대한 전 전 대통령 측의 주장은 확실히 틀렸다”라고 전했다.
한편 민 전 비서관은 지난 7일 전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찾아 전 전 대통령을 만나고 온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민 전 비서관은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 내용을 전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려 왔다”며 “전 전 대통령이 특별히 잘못했다는 말씀은 없었다”라고 밝혔다.
이에 일각에서는 “보도 참고 자료의 파장을 고려해 앞으로의 대응 방향을 정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전 전 대통령 일가를 향한 검찰의 수사가 가시화된 상황에서 전 전 대통령 측이 향후 어떤 대응책을 내놓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