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김현철 씨가 한보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한보그룹 최종 부도 처리는 이석채 경제수석(현 KT 회장)의 몫이었다. 지방의 중소기업이 무너져도 영향이 미치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부도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경제 논리로는 당연히 부도를 내야했음에도 이 수석은 혹시 정권 차원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폈다. 전 정권의 집권여당 대표이기도 했던 YS에게 누가 되는 일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나 역시 하루빨리 한보그룹을 부도 처리해야 한다는 이 수석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대통령에게 “한보를 부도처리하고 정태수 회장을 수사하는 데 있어 큰 문제가 없겠느냐”고 직접 묻기도 했다. 당시 YS는 통상적으로 기업들에게 대선자금을 지원받았던 것 이외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청와대와 사정당국은 한보그룹과 관련해 나와의 연관성을 예견하거나 비슷한 낌새조차 알지 못했다.
회사 부도 직후 특혜대출에 관해 검찰 조사를 받게 된 정태수 회장의 입에서 정치인들 이름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DJ의 비서실장인 권노갑 의원과 YS의 측근으로 통하는 홍인길 의원까지 나왔다. 일이 심상치 않자 청와대도 당황하기 시작했지만 YS는 단호하게 처리할 사안이라는 입장이었다.
야당에서 나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 것은 2월서부터였다. 한마디로 내가 한보그룹 부실대출의 주범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의혹의 발단이 되고 야당에 빌미를 준 것은 홍인길 의원의 “나는 훅 불면 날아가는 터레기(털의 경상도 방언) 같은 사람”이라는 한마디였다. 홍 의원의 이른바 ‘깃털론’은 실제 거대한 배후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불만을 제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야당은 실체 없는 몸통을 찾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한보사태와 관련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 알려진 것이 너무나 많다. 처음 검찰에 출두했던 나는 고소인 신분이었다. 당시 나는 야당의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한 상태였다. 국민회의 대변인(정동영)을 비롯해 한영애 설훈 의원의 주장은 하나같이 거짓말이었다. 나에 대한 야당의 흠집 내기는 신한국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한보사태에 대해서만큼은 그들이 한참 잘못 짚었기에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처음 고소인 조사에서도 검찰은 아무런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한보청문회에 정태수 한보 총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한 모습. 일요신문 DB
야당의 각종 허위비방이 난무함에도 한보사태는 소강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일이 재점화된 것은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의 ‘비디오테이프’ 파문이었다. 박경식이 어떻게 YS의 자문의사가 되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들은 바로는 1992년 대선 당시 그가 우리 쪽을 돕겠다며 어머니 주치의를 자처했고 그 공로가 인정된 것이었다고 한다. 정확히 박경식은 주치의가 아닌 주치의 밑에서 자문을 해 주던 사람이었다.
1995년 1월 대전에서 병원을 하던 박경식은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YS 주치의인 고창순 박사는 “병원 개업식에 김 소장이 대신 가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해 내가 참석하게 됐다. 당시 전화 통화는 개업식에 갔다가 원장실에서 찍혔던 것이다. 박경식은 개업식 손님으로 간 사람의 영상을 2년간 간직하다 묘한 시점에서 폭로했다. 당시 박경식은 고속도로 휴게소 운영권 하나를 줄 수 없느냐고 했지만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이 있었다. 앙심을 품은 그가 야권과 결탁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앞서도 밝혔듯 내가 총선 과정에서 공천에 관여한 것은 확실하다. 내 의도는 집권여당에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드는 일이었다. 여권에 젊고 개혁적인 인물을 많이 배출하면 문민정부 개혁 작업에 더욱 탄력이 붙고 결국 정권재창출에도 이로울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시도들은 야당은 물론 민주계 중진들조차 나를 견제 대상으로 삼게 만들었는데 박경식의 폭로는 여당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기폭제가 됐다.
비디오테이프 파문 이후 야당은 나에게 청문회 출석을 강하게 요구했다. 나갈 이유가 없었지만 YS는 일단 청문회에 나가서 사실대로 말한다면 불씨가 꺼지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내가 나가면 그 자체가 또 다른 파문을 낳고 언론에서도 분명 나쁜 쪽으로 여론을 몰아갈 것이 자명했다. 나는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YS의 간곡한 부탁을 연거푸 거절할 수는 없었다.
불행하게도 일은 내 예상대로 돌아갔다. 간판은 한보청문회였지만 실상은 김현철의 국정 농단에 대한 성토의 장이었다. 어느 의원은 내가 헬리콥터를 타고 한보철강이 인수한 당진제철소에 간 적이 있다고 소설을 썼고 또 다른 의원은 내가 한보 사람들과 식사한 장소라며 식당 사진을 들이밀기도 했다. 그냥 식당 전경이었다. 더 이상 진실은 중요치 않았다. 청문회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의 70~80%는 “김현철이 한보사태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1997년 3월 13일 경실련 관계자들이 김현철 씨의 비리 의혹 등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입수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때 나는 별건으로 구속됐다. 죄목은 알선수재와 조세포탈죄였다. 심재륜 중수부장이 수사관 300명을 동원해 내 주변 1000여 명을 이 잡듯이 뒤져서 찾아낸 것이었다. 변호사도 없이 조사에 응했던 나는 조사 막바지에서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문제가 된 것은 1992년 대선이 끝나고 남은 대선잔금이었다. 이 돈은 나라사랑운동본부 총무 역할을 했던 동창생 박태중이 관리하다 이성호 대호건설 사장에게 맡겨졌다. 이성호는 돈을 맡으면서 이자 개념으로 나에게 매월 활동비를 지급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몇몇 동문 선배들은 대통령 아들로서 돈 문제에 휩쓸리지 말라며 아무 조건 없이 활동비를 지원했다. 이 외에 나는 다른 금전적 지원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물론 돈을 개인적으로 쓴 것도 아니었고 사무실 운영과 여론조사 비용 등 실제 활동비로 사용했다. 이권개입과 청탁대가성 돈이 전혀 아니었지만 검찰은 믿지 않았다. 나에게 활동비를 지원한 사람들 대부분이 기업인이었기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심정으로 수사를 진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이성호의 허위 진술이었다. 이성호는 검찰 조사에서 나에게 온갖 청탁을 했지만 들어준 것은 하나도 없었노라고 진술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청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검찰은 “청탁을 했다”는 말과 대선잔금을 연계시켜 나에게 알선수재 죄명을 씌웠다. 나는 이성호와 대질 심문을 원했지만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검찰은 대선잔금에 대한 이자소득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세포탈죄를 적용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없었던 사례다. 당시 대선잔금은 어차피 다음 총선과 대선 때 쓰일 돈이었기에 사조직이 관리하고 있었다. 실제 이성호에게 맡겼던 대선잔금 50억 원은 총선 과정에 대부분 쓰였고 이후 조동만 한솔그룹 부회장에게 맡긴 70억 원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지만 수사 과정에서 김기수 검찰총장은 나에게 역제안을 하기도 했다. “일단 정국이 시끄러우니 조그만 건으로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그맣든 크든 전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범죄자가 되고 감옥을 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은 YS 역시 내가 구속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측근들로부터 잘못된 보고를 받고 내가 기업인들로부터 부당하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날, “이틀 조사 받고 인사드리러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나에게 아버지는 그 사실을 숨긴 채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다”고 할 뿐이었다. 참으로 비정한 부정이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