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이후 이 창업주의 둘째딸 이숙희 씨, 차남 창희 씨의 며느리 등이 소송에 가세해 청구금액이 최종 4조 849억여 원까지 늘어났다. 변호인단을 구성한 화우 측이 법원에 납부한 인지대만 127억 원에 달하는 등, 개인 재산 분할 소송으로는 초유의 규모로 화제를 모았다.
재판부는 약 8개월간의 공방이 끝에 이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재판부는 원고 측이 이 회장을 상대로 낸 삼성생명 주식 17만 7732주에 대한 인도청구와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낸 삼성생명 주식 21만 5054주 인도청구를 각하하고 원고의 나머지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건희 회장의) 상속 재산으로 인정되는 주식에 대한 인도청구는 10년의 제척기간이 경과돼버렸고, 나머지 삼성생명 주식과 이건희 회장이 수령한 이익배당금은 상속재산이 아니다”고 판결의 이유를 밝혔다.
이후 이숙희 씨 등은 항소하지 않았지만, 이맹희 전 회장 측은 지난 2월 소송가액을 대폭 축소해 96억여 원을 청구하는 내용의 항소를 제기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항소심에서도 이 전 회장의 청구가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1심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기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관측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1심에선 이 창업주가 남긴 삼성생명 주식 중 일부가 상속 재산이란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전 회장이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이 소멸했고, 나머지는 상속 재산이 아닌 점을 들어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차명계좌를 통한 비정상적인’ 상속과정이 있었다는 점은 확인이 됐다. 이 창업주가 제삼자 명의로 신탁한 상속재산을 단독 명의로 변경한 것은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바로 이 ‘차명계좌’에 대해 질타하는 사회적 여론이 최근 형성돼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탈세와 해외 재산도피 혐의 등으로 구속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비자금을 관리하기 위해 수백 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했음이 드러났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추징금 환수 과정에서도 재산을 숨기기 위해 노숙인의 이름까지 사용했던 사실이 드러나 공분을 샀다.
12일로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지 만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차명계좌가 갖가지 탈세와 비자금 조성, 자금 세탁, 편법 증여나 상속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현실이 드러났고, 이러한 범법 행위를 막기 위해 강력한 제재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벌써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금융실명제를 강화하는 여러 개의 법안이 발의돼 있다. 이들 법안들이 실제로 통과돼도 삼성가의 상속소송에 소급 적용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적어도 차명계좌를 통한 상속을 확인한 이상 재판부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삼성가 소송 과정을 잘 아는 한 변호사는 “법리적으로는 이 회장에게 유리한 게 사실이지만, 재판부도 여론의 변화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원고 측 변호인단이 차명계좌를 통한 상속에 대해 어떤 논리를 펼지, 재판부가 바뀐 국민 정서를 얼마나 고려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 전 회장의 아들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비자금 수사에서 세간의 추측대로 이 전 회장 소송비용의 출처가 CJ그룹의 비자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삼성가의 상속재산을 둘러싼 분쟁은 두 그룹 간의 전면전으로 더욱 격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