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외투쟁’이라는 초강수를 둔 김한길 대표가 빈손으로 원내에 복귀할 경우 정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박은숙 기자
“분명 김 대표는 지난 과거 대통령을 탄생시킨 당대 최고의 전략가였다. 하지만 ‘수장’과 수장 곁에서 전략을 기획하는 자의 입장은 천양지차다. 막상 당권을 쥐고 수장에 오른 그지만 좀처럼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 본인 스스로 무척 답답할 것이다. 현재 그의 모습이 어쩌면 본인의 태생적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기자와 만난 한 민주당 중진 의원이 현재 김 대표의 안타까운 처지를 두고 넌지시 꺼낸 말이다. 정국을 읽는 눈은 물론 뛰어난 지략까지 겸비해 ‘당대 최고 전략가’란 평가를 받으며 DJ시절부터 정권 창출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 대표. 하지만 본인 스스로 정국 현안의 전면에 나선 이후엔 그 어떤 전략이나 흔한 지략도 펼쳐보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김 대표는 7월 31일 의원총회 이후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장외 투쟁’을 선언했다. 여야 간 국정원 국정조사 협의가 여의치 않자 서울광장에 천막당사(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해 놓고 장내·외 동시 투쟁을 진행해 여권을 압박한다는 초강수 전략이었다.
물론 장외투쟁 돌입은 김 대표로서도 고심을 거듭해 내린 결론이었다. 민주당 내에서는 김 대표의 긴급기자회견 직전까지도 장외투쟁 여부를 두고 비관적인 견해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외투쟁 불가’라는 전임 지도부(비대위)의 약속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초강수 전략이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와 민주당을 겨눌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던 것이다.
김 대표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명운을 내건 도박을 한 셈이었지만 현재 상황을 들여다보면 과연 장외투쟁 전략이 최선이었는지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무엇보다 현재 원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정원 국정조사가 표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김 대표의 속은 더 타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장외투쟁의 최종 목적지는 목표달성 후 다시 원내에 복귀하는 것 아닌가”라며 “김 대표가 원내로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다. 첫째는 여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국정원 국정조사 최종 결과 보고서를 도출하는 것이고, 둘째는 본인이 제안한 영수회담 성사다. 하지만 지금 이 두 가지 다 여의치 않아 보인다. 까딱하면 어떤 명분도 퇴로도 찾지 못할 수 있다. 애초부터 확실한 퇴로를 염두에 뒀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김 대표로서 뼈아픈 부분은 민주당 내부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 일각에서는 김 대표가 빈손으로 원내에 복귀할 경우 민주당 내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김 대표에게 직접 책임을 묻는 ‘연판장’을 돌릴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앞서의 민주당 당직자는 “현재로선 국정조사 결과에 따라 연판장 시나리오까지 배제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당 지도부 최고위원 차원에서 김 대표의 의원직 사퇴까지 요구할 수 있다. 이는 당 분위기가 김 대표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지난 13일 서울광장 천막당사 앞에서 기자와 만난 한 초선의원은 “당론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상황이지만 난 애초부터 장외투쟁 자체를 끝까지 반대했었다. 아예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대표는 장외로 나왔다. 큰 결단을 하고 나온 이상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 이는 끝까지 장외투쟁 반대를 고수했던 우리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다”고 김 대표를 향해 엄포를 놨다. 무엇보다 이 초선의원은 김 대표와 함께 같은 비주류 진영에 속하며 지난 전당대회부터 뜻을 함께했던 터라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다.
그러면서 그는 “잘 봐라. 지금 민주당이 누구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지. 김한길 지도부인가? 절대 아니다. 김 대표가 당권을 쥔 이후 모든 이슈와 현안은 문재인 의원을 비롯한 친노 진영과 국정조사 특위 소속 강경파에 의해 끌려 다녔다. 심지어 몇몇 강경파 의원들은 당 지도부를 향해 협박조의 얘기도 서슴지 않았다. 이를 전혀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는 김 대표에게도 분명 책임은 있다”며 격정적으로 속마음을 토로했다. 다만 그는 연판장 시나리오에 대해선 “아직까지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았다”며 말을 아꼈다.
보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장외투쟁의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는 점도 김 대표로서는 부담이다. 기자와 만난 또 다른 초선의원은 “현재 장외투쟁은 6교대로 운영되고 있다. 의원들마다 6일에 한 번꼴로 현장을 지키고 있다”며 “매일 비좁은 천막에서 20명씩 다닥다닥 자리한다. 이 무더위 속에서 정말 죽을 맛이다. 교대 타임을 더 늘리든지 해야지 이러다 정말 탈진하겠다”고 현장에서의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국정조사 결과 보고서 채택도 지금으로선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김 대표가 제안한 영수회담 성사 여부는 더욱 불투명해 보인다. 청와대는 이미 김 대표의 양자회담 제안을 거부하고 여야 5자회담을 대안으로 고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 대표 입장에서는 양자회담에 앞서 사전 물밑 접촉 하에 여야 간 교통정리 후 공식 양자회담을 진행하고 선명한 합의안을 도출하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겠지만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정치컨설턴트 김대진 조원씨앤아이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선 나서서 얻을 것이 전혀 없다”며 “만약 박 대통령이 양자회담에 나서더라도 자신에게 절대 불리한 의제 집중을 분산하기 위해 국정원 건만이 아닌 최근 세제 개편안 등 최대한 많은 의제를 갖고 회담에 나오려 할 것이다. 단일 의제를 갖고 선명한 합의안을 도출해야만 하는 김 대표와는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막 다른 골목에 선 김 대표가 꺼낼 수 있는 카드는 과연 무엇일까. 국정조사 파행과 함께 영수회담까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원내로 복귀할 수 있는 출구가 완전히 막힌다면.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렇게 코너에 몰린 김 대표가 보다 강경한 카드를 꺼낼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의 민주당 당직자는 “퇴로가 없다면 뚫어야 할 것 아닌가. 김 대표는 이미 독이 오를 대로 올랐다. 출구전략이 여의치 않을 경우 어차피 더 강경한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다. 절대 어설프게 돌아가진 않을 것”이라며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장내·외 병행 투쟁을 넘어 전면 장외 투쟁에 나설 것이다. 그 선명성을 더하기 위해 단식 투쟁이나 본인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는 초강수를 둘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한증막 더위에 북카페 땡땡이^^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지난 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의 민주당 ‘천막당사’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일요신문>이 현장을 찾은 지난 13일 오후 2시에는 때마침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최고기온 섭씨 34도를 기록한 이날, 민주당은 홍종학 의원이 주관하고 최재성 의원, 장병완 정책위의장, 경병규 인하대 교수 등이 참석한 ‘박근혜 정부 세제개편안 토론회’를 개최했다. 하늘에서 내려쬐는 한낮 태양은 물론 서울광장 아스팔트의 지열이 고스란히 올라와 천막당사는 한증막을 방불케 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연신 손부채질로 더위를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도무지 토론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천막당사에 상주해 있는 취재진들 중에서는 한증막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슬며시 자리를 빠져나가는 이들도 꽤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증막 무더위도 민주당 천막당사에 어려움을 선사했지만 이날 현장에는 ‘애국주의연대’ ‘어버이연합회’ 등 보수 단체들이 찾아와 장외투쟁을 방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고성능 스피커를 동반한 어버이연합회의 시위 탓에 이날 천막당사 토론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물론 현장에 있는 당직자들과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제 보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장외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도 쌓여가는 모양새다. 천막당사 앞 서울도서관 북카페는 물론 인근에 위치한 P 호텔, 프레스센터 커피숍 등에서 더위를 피해 있는 민주당 당직자들과 고령의 의원들이 목격됐다. 특히 현장에 나와 있는 의원들의 개별적인 언론접촉은 인근 호텔 커피숍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프레스센터의 한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 한 중진 의원은 민망한 듯 “이러다 죽겠다. 잠시 수분을 섭취하러 온 것이다. 다시 현장에 나갈 것”이라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현장을 떠났다. 민주당 천막당사 현장에서는 여권과의 투쟁에 앞서 무더위에 타죽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