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대표는 국정원 사태와 관련,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종현 기자
“당 안팎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예외 없이 하는 말이 있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고생 정말 많겠다’고 하더라. 당연히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나선 자리다. 지난해 진보정치 세력이 여러 개로 쪼개지면서 정의당 자체가 무척 어려운 조건에서 출발했다. 이미 진보정치가 바닥을 헤매는 상황에서 내가 당대표를 맡았다. 대표 출마하면서 한 얘기가 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만약 우리가 혁신에 실패하면 당분간 진보정치는 없다’고. 숨 막히는 자리다.”
―엄밀히 따지면, 천 대표는 정통 진보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맞다. 노회찬, 심상정 같은 쟁쟁한 분들이 대표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이런 분들이 당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표가 된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전투적인 진보정치와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이, 그것도 원외인 내가 당대표를 맡는다면 당연히 위험요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도전적 선택’이 필요했다. 당 안에서 내게 출마를 제안한 것도, 내가 출마를 결심한 것도 그러한 이유다.”
―정의당은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약하고 차별성 없는 작은 당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지지율 0%라고 생각한다. 당명을 바꾸고 나서는 지지도는커녕 인지조차 안 되고 있다. 심상정, 노회찬은 알아도 그 사람들이 정의당 소속이라는 것은 잘 모른다. 이는 지난해 우리 잘못의 후과이기도 하다. 결국 제로베이스에서 환골탈태해야 한다. 소수의 활동가 중심의 확고한 지지율을 갖고 있는 진보정당도 있지만, 난 진보정당이 좁은 자기 청중만 대상으로 정치를 해선 안 된다고 본다.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의 90% 이상이 동의할 수 있는 진보정치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전 통합진보당 시절, 30개의 재벌을 3000개로 쪼개겠다는 목표를 세운 바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다. 이런 식의 정책은 이제 버려야 한다. 앞으로의 정책은 상생할 수 있는 것, 대다수 국민이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특권을 폐지하거나 권한을 축소할 수는 있지만, 특정 계층을 배제하거나 타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천 대표는 국정원 대선개입에 항거하는 차원에서 1인 시위에 나섰고, 촛불시위에도 직접 참여했다.
“이번 사태는 한마디로 디지털 관권선거다. 단순한 댓글사건이 아니다. 중대한 선거 중립 위반 사건이다. 국정원이야말로 엄청난 예산과 인력, 특권을 갖고 있는 조직 아닌가. 최소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이렇게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시도는 없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론에 대해 언급했다.
“무책임한 일이다. 물론 나도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이러한 일을 인지하거나 지휘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믿는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를 도왔느냐는 거다. 현 시점에서 국정원의 잘못을 사과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박 대통령이다. 4·3 사건에 대한 지난 정부의 잘못을 노무현 대통령이 왜 사과했겠나. 정치적 책임은 현 대통령이 갖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 사안과 관련한 조직과 사람들에 대해 엄중히 처벌해야 할 정치적 책임이 있다. 박 대통령이 사과하면 야당에 굴복하는 것인가? 아니다. 과감하게 사과하고 국정원 개혁에 착수하는 것이 박 대통령 개인에게도 더 좋을 것이다.”
천 대표(맨 왼쪽)가 지난해 8월 통합진보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모습. 이종현 기자
“특검 얘기도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나. 만약 보고서 채택 안 되면 ‘반전의 미학’이라도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가 사과하면 권위가 무너진다’는 유신시대 제왕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노무현 정부 출신으로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정국을 주도한 문재인 의원의 행보에 대해 관심 있게 지켜봤을 것 같다.
“이미 NLL 대화록 공개는 잘못했다고 말했다. 다 지나간 얘기다. 개인적으로는 문 의원이 민주당을 뛰어넘어 폭넓은 정치혁신과 비전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야권이 새롭게 협력관계를 갖고 박근혜 정부와 맞서나갈 수 있는 큰 그림을 제시하면 좋겠다. 문 의원과 더불어 민주당에도 바라는 바다.”
―안철수 세력과의 연대 여부도 큰 관심사다. 무엇보다 천 대표가 취임 이전부터 연세대 80학번 동기인 하승창 전 안철수캠프 대외협력실장, 조정관 전남대 교수 등 안철수 캠프 인사들과 은밀히 접촉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조정관 교수는 최근 강연 초청 외에 만난 적은 없다. 하승창 전 실장과는 대학(연세대 사회학과) 1학년 때부터 만나온 친구 사이다. 실제 지금도 자주 만난다. 아마 소문이 난 것은 지난 4월 노원병 보궐선거 때 만난 사안인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 전 실장도 그렇고 그 쪽과 연대와 협력을 위해 만난 것은 절대 아니다. 당시는 오히려 ‘왜 하필 그 지역구에 출마하느냐’며 항의하고 싸우기 위해 만난 것이었다.”
―당시 후보단일화 협상에 천 대표와 하 전 실장이 나섰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 것인가.
“무슨 공식적 채널이 개설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인간관계가 있기 때문에 화두를 주고받는 수준이었다. 그것은 지난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10월 재·보선과 내년 6월 지방선거가 다가온다. 야권 연대 여부를 포함해 정의당의 계획은.
“내년 지방선거는 가능한 많은 후보가 출마할 수 있도록 하겠다. 다만 10월 재·보선은 폭이 너무 좁다. 전 지역에 다 낼 수 있다고 보진 않는다. 두 세 지역 정도 검토 중이다. 이번 재보선은 안철수 진영도, 민주당도 본인의 실력을 가늠할 기회라 판단하기 때문에 연대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실력대로 부딪쳐 볼 생각이다. 내년 지방선거는 그 시점에 가봐야 알 것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