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7월 2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신한국당 전당대회. 김영삼 대통령(오른쪽)이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이회창 대표의 손을 들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대선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후보에게 있었다고 본다. 심하게 말하자면 이회창 후보는 집권여당의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앞에서 밝혔던 대로 4개월 만에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그를 당에 영입한 것은 내 생각이었다. 당시 이회창 전 총리는 “문민정부에서 초대 감사원장에 국무총리까지 했는데 총선 승리에 일정 부분 책임을 맡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 말에 동의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총선에 대한 역할을 주문했던 것인데 그가 이듬해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 이회창 후보가 날개를 단 것은 1997년 3월 당 대표 선출이었고 이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크나큰 패착이었다. 나는 이회창 후보가 당 대표를 맡는 것에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결코 이회창 후보 개인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었다. 대선을 앞둔 해에 당 대표를 맡는 것은 엄청난 프리미엄을 얻는 일이었다. 대권에 나가려는 후보가 대표직을 겸임한다는 것은 다른 후보들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임이 자명했다.
사실 YS는 이회창 후보에게 대표직을 제안하기 전 이한동 전 총리에게 대표직을 제안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대선후보 경선을 관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한동 전 총리 역시 대권주자였기에 본인의 출마를 위해 YS의 요구를 정중히 거절했다. 이회창 후보 역시 대표직을 맡지 말았어야 했다.
이는 YS가 여론과 민정계 목소리에 밀린 탓이기도 했다. 그 해 내가 한보사태에 연루되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당내에서는 수습 차원에서 이회창 전 총리에게 당을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당시 내가 YS에게 조언한 것은 충청도 출신의 김종호 의원에게 대표를 맡기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대권주자도 아니었고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은 김 의원이 적격이라고 여긴 것이다. 몇몇 언론에서도 김종호 의원이 차기 당 대표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일이 잘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불현듯 이회창 후보가 대표가 됐다.
집권여당 안에서는 내가 구속까지 이른 상황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한 측면도 있었다. 민정계 출신 의원들은 “김현철을 YS와 떼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곤 했다. 당시는 매일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내 생각을 청와대와 YS에 전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안부 전화를 나누는 것조차 집중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1997년 11월 3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회의-자민련 대선후보단일화 합의문 서명식.
중립적인 경선 룰이 무너진 상황에서 다른 후보들의 반발과 후보 교체 목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불난 데 기름을 끼얹은 것은 8월 불거진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었다. 병역 의혹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고 줄곧 여론조사 1위를 유지하던 지지율이 10%대로 주저앉았다.
결국 이를 계기로 대선 석 달을 앞두고 이인제 전 지사가 탈당 이후 독자출마를 선언했다. 아마도 병역 파문 이후 여론조사에서 1위로 올라선 것이 결심 계기가 됐던 듯하다. 당시 YS는 이인제 후보를 청와대에 불러 출마를 말렸지만 “이회창 후보로는 DJ를 이길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의 판단이 꼭 틀리지만은 않았다고 본다.
이회창 후보 측에서는 이인제 후보의 탈당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았다. 상황이 엄중한 만큼 후보 본인이 직접 나서야 했지만 끝까지 측근을 시켜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인제 후보의 탈당은 결국 김심이 작용한 것”이라며 YS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이인제 후보에게도 YS에게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한편 DJ 측은 차근차근 대선을 준비하며 김종필 자민련 총재(JP)와 DJP연합을 성사시켰다. 대선의 승패는 정적을 얼마나 끌어안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만일 이회창 캠프에서 JP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충분히 힘을 보탰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실제 양쪽 모두 JP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호재를 빼앗긴 것은 결국 후보 역량의 차이였다.
DJP연합으로 충청권 표심이 야권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PK(부산·경남)는 이인제 후보, TK는 이회창 후보에게 각각 쏠렸다. 당시 이인제 후보는 500만 표(492만 5591표)를 얻으며 선전했는데 PK에서만 100만 표를 얻었다. 당시 DJ와 이회창 후보의 표차는 39만 표에 불과했다.
이회창 캠프에서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꺼내든 것은 강삼재 사무총장의 ‘DJ 비자금 폭로’였다. 이회창 후보는 연일 검찰 수사를 촉구하며 청와대를 압박했지만 그때 수사가 진행됐다면 아마 선거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보다 지역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YS가 야당 후보인 DJ를 수사한다는 것은 대통령 선거중립 의무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회창 캠프에서는 YS가 뒤에서 DJ를 돕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망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다 이긴 선거를 스스로 망칠 필요가 있었을까.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문민정부가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것은 후보가 대세론에 휩쓸려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었다. 1997년도, 2002년도 두 아들의 병역 의혹이 꼭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YS, 탈당 후 DJ 먼저 만난 까닭은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0월 1일 계룡대 운동장에서 열린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일요신문 DB
―대선을 앞둔 YS의 발언은 지금도 궁금증을 남긴다.
“김심은 무심이었다. 신한국당이 총선에서 젊은 인재를 많이 영입해 승리한 것을 빗대 대선에서도 젊고 참신한 후보가 나와야 한다는 뜻에서 한 이야기였다. 너무 직설적인 측면이 있지만 특정 후보를 생각하고 한 것은 아니었다. 각 후보가 저마다 ‘김심은 나를 향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YS가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이회창 후보보다 먼저 DJ를 접견한 것도 말이 많았다.
“그건 DJ 쪽에서 먼저 만나자는 요청이 왔기에 응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이회창 후보 측에서는 만나자고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YS가 DJ를 만나니 화를 내는 상황이었다.”
―정권재창출은 실패했지만 오랜 라이벌인 DJ가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을 듯한데.
“어찌됐건 YS와 DJ는 함께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사이였다. YS가 당선자인 DJ를 만난 자리에서 ‘어디 당신이 한번 잘 해보시라’고 한 것도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환란청문회를 열어 문민정부 관료들을 줄줄이 구속하고 YS에게까지 출석을 요구했다. 전 정권과의 차별화는 필요하겠지만 정적을 제거하듯 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신한국당 ‘9룡’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997년 초에는 이회창 후보와 박찬종 후보가 지지율 1위를 다퉜다.
“박찬종 후보는 한마디로 튀는 정치인이었다. 대중적 인기는 높았지만 당내 세력이 없었다. 민정계가 이회창 이한동 최병렬 세 후보를, 민주계가 이인제 김덕룡 이한동 후보를 미는 상황에서 기반이 없었다.”
―다른 후보들은 어땠나.
“김덕룡 후보는 지금의 이정현 홍보수석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 호남 출신이면서 민주계 핵심에서 오랫동안 YS와 함께했다. 상당히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여론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이인제 후보에 비해 부족했던 것 같다. 이한동 후보는 민정계 쪽이지만 합리적이면서 능력이 뛰어나 나 역시 지지했다. 1차 경선에서 3등을 했는데 2위인 이인제 후보와 8표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재검표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최형우 후보는 뇌졸중으로 쓰려지면서 일치감치 대권 경쟁에서 멀어졌고 최병렬 후보는 ‘9룡’에 속하기에는 상대적으로 기세가 약했다. 경선에서도 꼴찌를 했고 4인 연대에도 혼자만 빠졌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