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8월 28일과 29일, 이틀간 이석기 의원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면서 적용한 혐의는 형법상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이중 내란음모는 1980년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5·18 광주민주화운동 배후로 지목해 사형을 선고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2004년 1월 재심에서 무죄)’때 등장했던 죄목이다. 더군다나 현역 의원이 내란음모로 수사받는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생소할 수밖에 없다.
형법 제87조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내란음모로 규정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공안사건이 있었지만 내란음모의 경우 혐의 입증이 까다로워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법조계에서도 “국정원이 이 의원의 내란음모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물증을 제시할 수 있는지 여부가 재판의 관건”이라고 입을 모은다.
일단 여야는 한 목소리로 이 의원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외치고 있다. 새누리당은 이 의원 혐의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과는 별개로 민주당의 원내 복귀를 요구했다. 황우여 대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며 “이렇게 중차대한 시기에 장외투쟁을 한다”며 민주당을 겨냥했다. 민주당도 이 의원과 선 긋기에 나섰다. 장외투쟁이 역공을 받을 수 있고, 국정원 개혁론이 동력을 잃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민주당으로선 지난해 대선의 ‘이정희 효과’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석기 의원과 확실하게 거리를 두려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온도차는 있지만 정치적으로 이 의원과 통진당은 고립된 셈이다.
국정원이 압수수색에 착수한 28일 자취를 감춰 ‘도피설’에 휩싸이기도 했던 이석기 의원은 29일 당 최고위원·의원단 연석회의에 참석,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이 의원은 “국기문란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이 진보와 민주세력을 탄압하고 있다”며 “유사 이래 있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탄압책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의원은 회의가 끝난 뒤 취재진에게도 “저에 대한 혐의 내용 전체가 날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국가기간시설 파괴를 비롯한 내란음모 혐의 등 압수수색 영장에 적시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선 입을 닫았다.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 의원이 8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 후 압수수색이 진행 중인 의원회관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법조계에서는 국정원이 이 의원에게 적용한 내란음모를 입증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기류가 우세하다. 이 의원 압수수색 영장에 적시된 내용은 △2004년부터 ‘RO(Revolutionary Organization)’라는 지하조직을 구성해 유사시 국가기간시설을 파괴할 것을 모의했고 △국내 정치권에 진출해 혁명기반을 마련해 결정적 시기가 오면 정권을 획득하려 했다는 것이다.
공안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내란음모로 처벌하려면 단순히 말을 했거나 모의를 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구체적인 목적성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까다로운 수사”라면서 “국정원이 그 정도의 증거를 확보했는지 미지수”라고 말했다. 진보단체에서는 국정원이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외에 내란음모를 영장에 끼워 넣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여권 주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국정원 수사가 지지부진할 경우 그 파장을 박근혜 대통령이 고스란히 짊어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국정원이 오래 전부터 내사를 진행해왔다고 하더라도 최종 OK 사인은 박 대통령이 내리지 않았겠느냐. 따라서 정치적 책임은 박 대통령이 져야 할 것”이라면서 “박 대통령이 사정 라인 핵심 인사들을 공안통으로 발탁할 때부터 (이석기 건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정원이 이 의원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서기 전 청와대 몇몇 참모들은 그 시기나 방법 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이 의원 수사와 관련해) 국정원과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 것은 맞다고 보면 된다. 일각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남재준 원장이 밀어붙였고 박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았겠느냐”고 설명했다.
국정원은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전직 국정원장 구속, 대선 개입 의혹 청문회라는 수모를 겪으며 개원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국정원은 이번 수사를 통해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9월 정기국회에서 논의될 예정이었던 국정원 개혁안에 대한 ‘물타기’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결과로 보여줄 것”이라며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취임 후 대북 업무 강화를 주문했던 남재준 원장의 첫 공안 수사라는 점에서도 국정원은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국정원은 사상 최대인 100명에 달하는 직원들로 수사팀을 꾸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관계자는 “지금 이 의원과 통진당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앞으로 증거는 쏟아질 것이다. 지금은 압수수색 영장 발부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료들만 공개된 것”이라면서 “국정원이 현역 의원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국정원 직원들이 8월 30일 새벽 이석기 의원의 사무실에서 압수물품을 가져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처럼 오랜 기간의 내사를 통해 상당한 파일을 축적했고, 내란음모를 입증하기 위한 확실한 물증을 확보했다는 게 국정원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국정원의 또 다른 관계자는 “RO 회합에서 오간 말을 기록한 녹취록뿐만 아니라 동영상도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그 영상엔 이 의원이 직접 발언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고 한다. 국정원이 갖고 있는 자료의 신뢰도가 높다는 얘기다. 증거인멸 우려가 높은 대공수사 특성상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특히 국정원은 이 의원과 RO의 자금원 파악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정원은 28일 이 의원 주거지 압수수색 당시 신발장에서 러시아 화폐가 포함된 1억 4000만 원을 발견한 바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이 의원이 보관 중이던 돈이 북한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 내란음모 적용이 손쉬워진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이 의원 측은 “임차 보증금 반환 등의 용도로 급히 사용해야 될 목적”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외화가 포함된 현금뭉치를 검은 봉지에 싸서 신발장에 넣어두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또한 이 의원이 지불해야 할 임차보증금은 5000만 원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 국정원은 중국 국적의 한 사업가가 RO 측에 유로화 등 자금을 보낸 정황을 포착하고 이 의원 집에서 나온 돈이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를 수사 중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해당 사업가는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의원이 북측 인사와 직접 만났다는 첩보까지 포함해서 이 의원과 측근들의 해외 출입 기록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다”며 “이 의원 측근들 중 일부는 중국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적이 있었는데 밀입북을 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국정원에 따르면 이 의원은 북측의 고위인사와 직접 만나 RO 운영에 필요한 지침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또한 국정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이 의원 자금줄 역할을 했던 CNP전략그룹과 그 자회사 길벗투어가 RO의 혁명자금 조성에 관여했는지도 살펴보고 있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백두산과 금강산 여행업을 했던 길벗투어가 RO 조직원들과 북측 간 연결 루트로 활용됐을 것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