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법문을 들으러 간 것은 아니었다. 달라이라마 사원에서 매일 매일 코라를 돌며 기도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달라이라마의 사원인 남걀(Namgyal) 사원은 언뜻 보면 이게 사원이냐고 반문하게 된다. 넓지도 않고 웅장하지도 않다. 아니, 시멘트 바닥의 그 건물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사원에 들어갈 때 엄격한 몸수색은 사람을 당혹케 한다. 카메라도 안 되고, 휴대폰도 안 된다. 처음엔, 찍으면 안 되는 비밀이 이리도 많나, 뭐 이리 방어적인가 싶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달라이라마를 노리는 세력이 있어 경비가 꼼꼼한 것이다. 그런데도 수색하는 그들이나 수색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기분 나빠하지 않고 당연히 수색을 받아들인다.
티베트 사람들은 정말 머릿결이나 얼굴이나 자태가 우리와 너무 닮았다. 그들은 입고 있는 옷만 빼면 1980년대 시골에 가면 볼 수 있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었다. 어쩌다 마주 치면 식구인 양 환한 미소를 보내준다.
그 선하고 순한 사람들이 하는 대로 오체투지를 따라 해본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니 처음에 기도를 하게 만든 기원이 기원을 넘어간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 기대하고 있는 것, 미워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이 호흡에 나타나고, 바람에 날아간다. 땅에서 넘어난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보조국사 지눌의 말씀이 깨달음처럼 다가온다. 넘어진 곳도 땅이요, 일어서기 위해 의지해야 할 곳도 땅일 수밖에 없다는 그 말씀이.
생각해 보면 나를 이곳까지 부른 기원은 뭔가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 번뇌가 에너지가 되어 코라를 돌고 오체투지를 하는 것일 텐데, 하다 보니 갈망도, 욕망도, 사랑도, 미움도, ‘나’라는 생각도 사라지고 오로지 호흡만이 남는다. 호흡이 감정을 걸러내고 생각을 정리해주는 것이다. 열흘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왜 사람들이 좋은 땅을 찾아, 스승을 찾아 6개월, 1년, 3년 혹은 평생을 머무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처음엔 오체투지를 하는 그들의 방석이 더럽고 냄새가 난다고 느껴 내가 가져간 수건을 그 위에 깔았다. 며칠이 지나니 그 방석이 그들의 기원이고 땀이란 생각이 들면서 내 수건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 수건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그 다음날 어떤 이가 내 수건을 건네며 네가 두고 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수건 하나, 가방 하나 없어지지 않는 곳이 그곳이었다. 그 멋진 사원입구에서 내가 본 달라이라마 문장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복잡한 철학이나 화려한 사원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와 심장이 우리의 사원입니다. 온유함이 우리의 철학입니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