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2월 27일 첫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중단없는 개혁에 앞장설 것을 당부했다. 사진출처=<변화와 개혁>
문민정부 인사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과거 군부정권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당시 청와대가 보관하고 있는 존안자료(인사자료)들은 쓸모가 없었다. 당시 안전기획부와 보안사령부 같은 권력기관들을 상상해 보라. 편향되거나 구태의연한 인사들에 관한 기록들이 대부분이었다. 문민정부에 걸맞은 참신한 인물을 내부 자료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YS는 공적 채널보다 사적 채널에 의존하게 됐다. 대선이 끝난 직후 YS는 자신의 모든 인적 네트워크를 가동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사람과 직접 소통하기를 좋아하는 본인 성격상 직접 내각 인선에 관여해 근사한 작품 하나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지역별 안배였다. 문민정부 첫 내각은 영남 8명, 호남 6명, 충청 4명으로 지역 안배가 최우선으로 이뤄졌다. 당시 지역감정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호남 출신 ‘모시기’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전북 무주 출신 황인성 국무총리였다. 황 총리는 다소 보수적인 성향으로 초대 내각에 어울리는 개혁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상징성이 강하고 지역 안배가 크게 작용했다.
이회창 감사원장은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이회창 씨에 관해서는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감사원장 시절 그의 활약상은 국민적 지지를 얻기에 충분했다. 황 총리와 이 감사원장은 전형적인 발탁 인사로 YS와 정치적으로 인연이 있었거나 선거 때 공을 세웠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YS는 인선 과정에서 지역 안배뿐만 아니라 연령과 성별까지 고려할 것을 주문해 실무진들은 어느 자리하나 쉽게 맞출 수 없었다고 토로하곤 했다. 기준에 맞춰 몇 사람을 추천해도 조금이라도 개혁 이미지와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그냥 넘기지 않았다.
김무성, 김기섭
어렵사리 초대 내각을 조직하고 보니 예상치 못한 변수가 속속 등장했다. 문민정부에서 시작한 공직자 재산공개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김상철 서울시장은 그린벨트에 땅을 사고 집을 지은 것이 드러나 재임 7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고, 박희태 법무부 장관과 박양실 보건사회부 장관은 각각 자녀 편법 입학과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경질됐다.
당시는 인사청문회 제도라는 것이 없어 청와대로서는 또 어디서 구멍이 생길지 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문민정부 초반 인사를 박근혜 정부와 비교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인사청문회와 같이 어느 정도 시스템이 갖춰진 상황에서 여러 사람이 낙마한 박근혜 정부와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이 끊이지 않고 지적되는 것과 달리 YS는 누구와도 소통하는 대통령이었다. 이는 박상범 경호실장을 뽑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통령 경호실장은 막중한 사명감이 부여되는 자리이기에 전문성과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 필요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은 군사정권 때부터 일한 군 출신이 많아 경호실장만큼은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YS는 박상범 경호실장을 끝까지 고집했다.
잘 알려졌듯 박 실장은 10·26 사태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유일하게 살려준 부하였다. 처음에 그는 경호실장 자리를 고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YS는 박 실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거나 청와대로 불러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그를 경호실장으로 앉혔다. 10·26 때 다리에 총상을 입었던 박 실장은 아버지가 조깅을 할 때마다 제대로 뛰지 못해 경호상 문제점이 계속 지적됐지만 그때마다 YS는 “박 실장은 아부하고 욕심 부리고 그런 게 없다”며 단칼에 거절하곤 했다.
황인성, 이회창
김기섭 기조실장은 나보다 아버지가 먼저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인 김 실장은 신라호텔 총지배인 시절부터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어 왔고 YS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안기부장으로 김덕 교수를 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조실장 역시 외부 인사가 필요한 찰나 정치력과 자금운영에 대한 감각이 있는 그가 자연스럽게 물망에 오른 것이다. 김 실장 역시 대선이 끝난 이후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가고 싶다고 YS에게 직접 요청했다.
물론 내가 직접 추천해 청와대로 들어간 이가 없지는 않다. ‘동숭동팀’을 맡으며 선거에 공을 세웠던 전병민 실장과 청와대 내 사정팀을 이끌었던 이충범 비서관은 내가 직접 추천한 인사였다. 1992년 대선이 끝난 뒤 전 실장은 “대통령 지근거리에서 개혁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을 나에게 전했다. 대선 때 공헌을 했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심정인 것 같아 흔쾌히 도움을 준 것이었다.
물론 그런 오해들이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지금은 알 것 같다. 새로운 인물이 청와대로 갈 때마다 여당 내 민정계와 공화계, 심지어 민주계조차 시선이 곱지 않았다. 특히나 전병민 실장은 원래 없던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었기에 민주계 가신들에게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김기섭 실장 역시 민자당 총재 특보로 정치권 입문하는 과정에서 다들 나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직접 확인해 온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당 안에서 세력이 단단하게 굳어진 상황에서 눈에 띄는 것이 전병민 실장이나 김기섭 기조실장이었고 자연스럽게 나와 연결시키는 분위기였다. 이해 못할 상황도 아니지만 민주계 인사들조차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원통하다. 내가 아는 정치권 인사들은 대부분 그들도 알고 있었고 나는 따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내가 주말마다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오찬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아 했다. 그건 가족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임에도 유독 나에게만 십자포화가 가해졌다. 대통령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청 개방·안가 철거…다 여기서 나와”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제도는 문민정부에서 처음 도입된 것이다. 문민정부 인수위는 지역별로 1명씩 인수위원을 뽑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현철 교수에게 첫 인수위원회 비화를 물었다.
―인수위원회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도 문민정부에서다.
“민자당에서 미국이나 영국의 사례를 참고해 만들었던 것이 지금의 인수위원회다. 과거 대통령들은 사실상 인수인계라는 게 필요 없지 않았나. 지금처럼 정부조직개편안을 만들거나 대통령 공약을 하나하나 따지기보다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분위기였다. 회의가 열릴 때마다 기자들이 인수위 복도 앞에 장사진을 친 것은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인수위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당의 견제도 심했다고 들었다.
“당시 김종필 지도부가 틈틈이 당 우위를 주장하곤 했다. 너무 견제가 심해 어느 날은 정원식 인수위원장이 김종필 총재를 만나 ‘부처별 업무파악과 취임식 준비만 하겠다’며 달랬을 정도였다고 한다.”
―막판에는 ‘효자 프로젝트’라는 것은 무엇인가.
“효자 프로젝트는 정부 출범 이후 100일 동안의 청사진을 그린 일정표였다. 당시 인수위가 효자동에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청와대와 인왕산 개방, 경복궁 내 30경비단 이전, 궁정동 안가 철거와 같은 아이디어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국민들에게 문민정부에 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인수위와 관련해 본인이 맡은 역할이 있었나.
“엄연히 인수위원들이 따로 있었기에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김무성 의원이 인수위 행정실장은 맡고 있어 간간히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일요신문> 1103호 ‘김현철이 쓰는 문민정부 비사, YS공화국 <3> 금융실명제·재산공개’ 기사 본문 중 ‘김용민 세제실장’은 ‘김용진 세제실장’의 잘못이므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