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위의 말을 술자리에서 직접 들었던 상황을 설명해보겠다. 당시 나는 아는 여자 선배가 마련한 자리에 또 다른 지인과 함께 나갔다. 당시 만들어진 자리는 선배가 “내가 아는 분이 계신데 직장 후배들이랑 술 한 번 마시자고 하더라. 인맥 넓힌다는 의미에서 가볍게 나와라”고 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래서 선배, 나, 그리고 또 한 명의 지인, 이렇게 세 여자와 선배가 아는 분이 데리고 나온 회사 후배들 세 남자가 모였다. 모이고 보니 어째 3대3 짝이 맞았고, 첫 대면부터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갔다.
모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던 세 남자는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연구원’들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MBA 과정을 마쳤거나 혹은 국내 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친 남성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신감도 넘쳤고, 말하는 투나 행동에서도 뭐 하나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 아닌 문제도 있었다. 이 셋 모두가 유부남들이란 점이 그랬다.
나는 자리에 나가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는 선배 말처럼 인맥 넓혀서 나쁠 것 없고, 또 기왕 나간 자리 즐겁게 술만 마시고 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 달리 술잔이 몇 차례 돌면서 분위기는 ‘짝짓기’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자들은 점점 노골적으로 ‘나 오늘 이 자리에 애인 한 번 만들어보려고 나왔다’는 의중을 비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수위 높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른바 간을 보기 시작했던 남자들은 2차로 옮긴 술집에서 결국 속내를 확실하게 털어놓았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A는 “선배님은 얼마 전까지도 애인 있으셨잖아요”란 후배 B의 말에 “아니야. 난 마지막으로 애인이 있었던 게 올해 초였어. 오래 됐어”라고 거침없이 말했고, 점잖아 보이던 C는 “나는 지금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 중이다. 그래서 관계를 못한 지 너무 오래됐다. 힘들다”면서 빨리 애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래서 (애인은 만들되) 절대 가정은 깨뜨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애인을 하나쯤 두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이들의 솔직한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어쩌면 그렇게 당당할까.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지금까지 애인을 몇 명 사귀었는지 자랑하는 모습에서는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났다. 그래서 나에게 “혹시 우리 셋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요?”라고 묻는 C에게 나는 “없는데요”라고 말하고는 술자리를 파해 일어났다.
술자리를 나오면서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요즘은 누구나 애인 하나쯤은 두고 있다. 없으면 오히려 바보 취급 당한다.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만들게 된다”는 어느 남자 후배의 말이었다. 비록 밖에서는 한눈을 팔지만 집에서만큼은 아내와 아이들한테 100점짜리 남편과 아빠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죄책감이 안 든다는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 하는 초적절한 말이 아닐까. 순한 양 같은 남편이 사실은 늑대란 사실을 아는 순간, 불행은 시작될 테니까. 물론, 모든 대한민국 남자가 이럴 것이라는 일반화의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할 테지만.
김태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