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재미 삼아 아시아인의 목을 베는 장면이 잔혹성 논란을 불렀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맨발의 겐>.
최근 일본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 중 하나는 원폭 참상을 그린 만화 <맨발의 겐>을 아이들이 보게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었다. 논란의 중심에 선 <맨발의 겐>은 나카자와 게이지(中澤啓治·1939∼2012)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가족을 잃은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그린 만화. 세계 20여 개국에 번역, 출판돼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사건의 발단은 2012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쓰에시 교육위원회에 한 남성이 <맨발의 겐>을 초·중학교 도서관에서 철수하라고 진정을 접수한 것. 그는 “만화에 옛 일본군의 근거 없는 만행이 게재돼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인식을 심어준다”고 주장했다. 실제 만화에는 일본군이 다른 아시아인의 목을 재미삼아 자르거나 여성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장면들이 실려 있다. 또 만화 속 주인공 겐은 “천황은 전쟁범죄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중학교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기도 한다.
마쓰에시 교육위원회는 당시엔 남성의 진정을 기각하지만, 2012년 12월 교장회의에서 “초·중학생들이 <맨발의 겐>을 자유롭게 열람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이 같은 조치가 최근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일본 사회에서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마쓰에시의 열람 제한 조치를 두고 치열한 찬반 논란이 불붙은 것이다.
먼저 열람제한을 찬성하는 입장은 “잔혹한 장면이 있어 어린 학생들이 자유롭게 읽는 것은 부적절하다” “흥미 위주로 폭력적인 장면만 읽는 학생이 나올 수도 있다”는 의견으로 압축된다. 정치학자 이와타 아쓰시(岩田 温) 역시 “난폭하게 참수하는 장면이 일본군 전체의 방침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면서 “반일사상을 심어줄 수 있기에 학교 도서로는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 언론들의 논조도 찬반으로 뚜렷이 갈렸다. 보수성향의 <산케이신문>은 “어른은 자유롭게 읽고 판단할 수 있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게는 읽히고 싶지 않은 도서도 있다. 연령에 따른 적절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진보성향의 <마이니치신문>은 “<맨발의 겐>은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워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교육에서도 전쟁의 무서움과 평화의 고귀함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질타했다.
이처럼 찬반양론은 팽팽했지만 여론은 열람제한을 반대하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마쓰에시의 어린이들이 <맨발의 겐>을 자유롭게 읽도록 하자’는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닷새 만에 2만여 명의 네티즌들이 서명에 참여했다. 일본만화가협회도 ‘마쓰에시의 조치는 만화가들의 표현 규제로 연결될 수 있어 우려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전국에서 항의와 비난이 쇄도하자 결국 지난 8월 26일 마쓰에시 교육위원회는 <맨발의 겐> 열람 제한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시 교육위는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나온 방침이었다”면서 “철회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논란으로 인해 일본인들 사이에서 <맨발의 겐>에 대한 관심이 증가, 서점마다 품절 현상을 빚고 있다. 출판사 측은 “예년 대비 판매량이 크게 늘었고, 주문이 쇄도해 증쇄 작업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원폭 참상 그려
주인공 겐 눈앞에서 아버지, 누나, 동생이 타 죽는다. 동생이 “엄마 뜨거워요”라고 울부짖는 장면.
눈이 뭉개지고, 손과 발이 녹아들어가는 피폭자. 숨만 쉬고 있을 뿐 애벌레나 다름없다. 그의 앞에서도 이웃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한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아소 다로도 ‘그건 아니지’
그러나 또 다른 망언제조기로 유명한 인물, 아소 다로 부총리는 “주간지에 연재되었을 당시 작품을 읽었다”고 언급하면서 “<맨발의 겐>보다 열람을 금지해야 할 성인만화들이 훨씬 많다. 그쪽이 더 문제 아닌가”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참고로 아소 다로 부총리는 만화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