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방송에서는 여전히 고부갈등을 다룬다. 여전히 시댁은 불편하고, 시댁과 관련하여 눈치 없는 남편, 효자 남편은 최악 중 하나다. 다만, 차이는 옛날 여인들의 이야기가 하녀처럼 살아온 세월이 만든 눈물에서 온다면 현대 여성들의 이야기는 기 싸움에서 온다. 운명의 굴레가 만든 눈물 대신 유머와 말재주에서 오는 재미가 있다. 결혼해서는 안 되는 남자는 금쪽같은 내 새끼, 하늘이 낸 효자,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그런데 며느리들의 재치 있는 분노에 낄낄거리다 보면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도대체 저렇게 속을 상하게 하는 인연을 만드는 결혼을 왜 할까,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여자들이 친정과 가까이 지내면서 친정어머니의 참견에 장모 사위 갈등이 만만찮게 문제되는데. 나는 궁금하다. 저렇게 공공연히 시댁 욕을 하는 가정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와는 다른 가족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점이.
경계를 넘어오는 시어머니를 거부하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분노, 돈 있으면서 도와주지 않는 시집에 대한 불만, 경제력의 차이가 있는 동서들의 경쟁과 시기, 말로 받는 상처들, 그 사소하지만 심각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요즘 시대는 정말로 시댁이 죄고, 가족이 죄다. 더구나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모이는 추석 아닌가. 말조심, 행동 조심 하지 않으면 갈등이 드러나 서로를 할퀸다.
사실 특정한 인연이 가져올 고통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세상 누가 쉽게 정에 빠지고 인연을 맺겠는가. 대부분의 악연은 내가 거리를 두고 멀리 하는 ‘악’에서 오지 않고, 내가 좋아했고 사랑했던 ‘선’이 변하여 악이 된 것이다. 오죽하면 불가에서 부모와 자식, 부부를 업연(業緣)으로 만난 사이라고 할까. 업연으로 만났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끊이질 않고 고통과 분노가 되풀이되는 관계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가까운 가족에 대해 이제 물어야 한다. 가깝다고 해서 너무 기대하고 요구하고 몰아붙이지는 않았는지. 격이 없다고 믿어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결혼한 자식에서 경계를 긋지 못하는 부모 세대의 문제는 부부 사이에 경계를 참지 못하는 바로 ‘나’의 문제와 연결된 것은 아닌지. 결국은 남편을, 아내를 살짝 만이라도 ‘남’으로 대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건 아닌지. 독립된 인격으로 대해야 하는 것은 사춘기 이후의 아이들만은 아니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