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
SK그룹의 침통한 분위기는 선고공판 당일 최 회장의 부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던 노 관장은 이날 선고가 내려지자 방청객들이 모두 퇴정한 뒤에도 한참이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다 직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법정을 나섰다.
SK그룹 관계자들은 당장 대외 신인도 하락을 걱정하고 있다. 형제 동시구속 사태가 기업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각종 사업추진과 신용평가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사기 저하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또 다른 SK그룹 임원은 “항소심 선고 전에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준비해놓았는데, 대내외적으로 분위기를 일신하고 경영안전을 꾀할 수 있는 방안을 조만간 실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의 충격파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룹을 이끌던 두 수장이 모두 유고상태에 접어든 만큼 “경영차질은 이제부터 본격화될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다. 최 회장의 부재 상황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은 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지난 1월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아 구속 수감된 지 8개월이 지났다. 4년의 형기를 마치려면 앞으로도 3년 4개월이 더 지나야 한다. SK그룹은 대법원에 상고할 예정이다. 대법원의 파기환송이나, 특별사면을 통한 감형 등을 기대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가 최 회장 형제를 유죄로 판단하게 만든 ‘죄질’을 볼 때 여의치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서울고법 형사4부 문용선 부장판사는 격앙된 목소리로 “죄를 면하기 위해 항소심에서 온갖 엉터리 같은 주장들을 들고 나왔다”면서 “정말 죄가 없다면 ‘죄가 없다’는 그 말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허위자백과 주장들을 만들어냈다”고 최 회장 형제를 훈계했다. 문 부장판사는 또 “허황되고 탐욕스러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계열사 자금을 동원했다”고도 했다. 한화 김승연 회장이 계열사들의 구조조정을 위해 자금을 사용한 불법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SK그룹은 올해 초부터 최 회장의 장기 공백에 대비해 계열사별로 자율적으로 사업계획을 세우고 이행하는 ‘따로 또 같이 3.0’ 체제를 시행해왔다. 계열사 대표들이 모인 수펙스추구협의회를 통해 경영안정을 꾀하고 있지만 그 한계도 뚜렷해지고 있다. 굵직한 해외 계약의 추진이나 수주 등은 오너가 아니면 추진력을 잃을 수 있는 것이다. 글로벌 사업추진은 더욱 어렵게 됐다.
SK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은 중국 베이징에서 베이징전기자동차, 베이징전공 등과 함께 전기차 배터리 합작법인 본계약을 체결하고 본격 사업을 앞두고 있다. SK종합화학도 올해 중국 최대 국영기업인 시노펙, 영국의 석유회사인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과 함께 중국 충칭에 부탄디올(BDO) 등을 생산하는 콤플렉스 조성을 위한 설립계약을 체결해 추진 중이다.
재계 관계자는 “SK그룹에 창립 이후 최대 위기국면에 처해있다”면서 “시장은 오너를 통해 기업의 신용도를 평가하는데, 그것은 수펙스추구협의회 김창근 의장 등 집단경영체제의 리더십에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승연 회장.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형 확정이 미뤄지면서, 김 회장의 구속집행정지는 당초 예정대로 오는 11월 7일까지 이어진다. 김 회장은 현재 김 회장이 조울증과 호흡곤란 등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한화그룹은 내년 1월쯤 열리게 될 파기환송심 때까지 경영권 공백을 최소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5월부터 그룹 경영을 맡아온 비상경영위원회가 경영 현안을 결정하는 기조는 유지되고 있다. 비상경영위는 그룹의 금융·제조·서비스 등 부문에 대해 김연배 한화투자증권 부회장(위원장),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 홍원기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사장 등 3명이 각각 분담하고 있다. 내년 설비투자 계획과 내년 초 그룹인사도 비상경영위원회가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비상경영위원들은 국내 사업장을 필두로 중국의 한화솔라원 공장, 말레이시아의 한화큐셀 공장 등을 잇달아 방문해 경영 상태를 챙기며 현지 직원들을 격려했다. 80억 달러(약 8조 5960억 원)가 걸려 있는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공사 현장에도 방문, 이라크 정부 관계자를 만나 사업 협조를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분명하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기업 경영에는 오너만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들이 많다”면서 “비록 오너의 부재상황이 정리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기는 했지만, 경영공백을 메우는 것은 여전한 과제”라고 말했다.
그런 측면에서 김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략마케팅실장의 역할도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실장은 7월 한화큐셀 본사가 있는 독일에서 경영수업 중이다. 한화 측의 적극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선 조기에 3세로의 경영권 승계작업이 진행될 것이란 관측이 파다하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