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 청와대의 강공 드라이브를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 비서실장은 ‘왕실장’을 넘어 ‘부통령’으로 불리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우하하(우리는 하늘 아래 하나다).”
지난 9월 1일 김기춘 비서실장이 새누리당 원내대표단을 초청해 베푼 만찬에서 나온 건배사다. 이를 들은 새누리당 몇몇 의원들은 “당과 청와대가 하나다? 당은 청와대 하는 일에 딴죽 걸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의미 아니겠느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치권에선 이날 만찬에 대해 ‘왕실장’을 넘어 ‘부통령’으로까지 불리는 김 실장 위상을 잘 나타내준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대통령이 아닌 비서실장이 자신의 공관으로 집권당 원내대표단을 부른 것 자체가 이례적이기도 하거니와 만찬의 전반적인 흐름을 김 실장이 주도했던 까닭에서다. 만찬에 참여한 최경환 원내대표,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 등은 여권에서 내로라하는 실세로 분류되지만 김 실장 앞에선 제대로 기를 못 폈다는 후문이다.
민주당은 만찬이 끝난 후 공세를 가했다. 우원식 최고위원은 “새누리당 원내지도부가 청와대로 가는 것은 대통령 초청에 응해 가는 것이 일반적인 예인데 비서실장 초청을 받고 한 것은 참 어색하다”면서 “대통령 주재 자리에서 (논의가) 있을 법한 현안과 인사 난맥상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한 것도 참 이상하다”고 밝혔다. 사실상 만찬을 주최한 김 실장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우 최고위원은 “청와대와 여당 관계에 대한 걱정이 많다”고 덧붙였다. 8월 8일 임명 후 여당 군기잡기에 나선 김 실장에게 끌려 다니며 ‘거수기’로 전락한 새누리당을 꼬집은 것이다.
여당 역시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비서실장이 부르면 당 지도부가 달려가야 하느냐”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새누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공식적인 당·청 협의나 개인적인 친분에 의한 만찬은 있었지만 이런 식은 처음 봤다. 현 정부 2인자가 자신의 세를 과시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고 전했다. 사실 김 실장 스탠스에 대한 우려는 진영 전 장관의 낙마 이후부터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고 한다. 김 실장이 원내지도부를 불러 “언론이 나를 과대 포장해서 부담스럽다”며 당을 다독이려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만찬이 김 실장 입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역효과를 낳은 셈이다.
만찬을 둘러싼 곱지 않은 시선이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조차 나오자 여권 핵심부는 진화에 나섰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화기애애했다. 상견례를 위해 만난 것이었을 뿐”이라며 확대해석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내부에선 이번 기회에 당·청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왼쪽부터 양건 전 감사원장, 채동욱 전 검찰총장, 진영 전 복지부 장관.
이처럼 여권이 들끓고 있는 것은 김 실장의 ‘광폭 행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박 대통령의 핵심 원로 그룹인 ‘7인회’ 멤버인 김 실장은 부임 후 강력한 친정체제 구축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다. 김 실장 부임 후 양건 전 감사원장,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잇달아 낙마한 것을 두고 야당은 ‘청와대 기획설’을 제기하고 있는 상태다. 김 실장이 사정라인을 전면 조정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직무의 독립성을 끌어올리려 안간힘 썼지만 역부족을 절감합니다(양건)”, “낙엽은 지지만 낙엽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채동욱)”와 같은 의미심장한 사퇴의 변이 김 실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를 두고 검찰의 한 고위 인사는 “코드 인사를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경고성 메시지도 있는 것 같다. 말을 안 들으면 언제든 찍어낼 수 있으니 입 다물고 있으란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 사퇴는 여권의 파워가 청와대로 쏠려 있음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기초연금을 담당하는 주무부처 장관이었지만 무력감을 토로하며 사직서를 던져야 했다. 진 장관은 정책 수립 과정에서 청와대 참모진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일요신문> 1116호 보도).
이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진 장관의 ‘항명’에 괘씸해하는 친박 인사들이 많지만 ‘제2의 진영이 또 나오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 또한 서청원 전 대표 공천을 놓고서도 정치권에선 청와대 의중이 작용했다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무성 의원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서 전 대표를 불러들였다는 것인데, 이 시나리오의 설계자로 김 실장이 지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여권에선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 실장의 ‘강수’가 단기간으론 박 대통령 국정 장악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일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얘기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청와대 힘이 비대해질수록 정부부처나 당은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또 청와대 참모진들도 김 실장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직언을 못 할 것이다. 이는 박 대통령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새누리당 초선 의원들은 “당이 너무나 무기력하다. 활력을 잃었다. 황우여 대표는 ‘바지사장’이고 김 실장이 진짜 대표란 말까지 나온다”며 지도부를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 역시 최근 김 실장 행보를 걱정하는 보고들을 귀담아 듣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 외곽 캠프에 몸담았던 한 교수는 “채동욱 사퇴, 서청원 공천 등을 놓고 부정적인 여론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VIP(대통령)에게도 전달된 것으로 안다”면서 “너무 밀어붙이면 지지율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얼마 전부터 박 대통령 지지율은 조금씩 하락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9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응답은 56%였다. 직전 조사에서 같은 응답은 60%, 9월 중순은 67%였다. 대통령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응답은 34%로, 직전 조사 대비 5%포인트 상승했다. 부정적인 평가가 30%선을 넘어선 것은 박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이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박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을 믿고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지금까진 굳이 야당과 타협하거나 여당의 협조를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는 반대로 말하면 지지율이 떨어질 경우 그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할 수 없다는 의미임을 박 대통령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인사 스타일로 유명하다. 정치권에서 김 실장 파워에 대한 조정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인사 등과 관련해 ‘무리수’를 두지 말 것을 당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기자와 만난 7인회 소속 인사의 최측근은 “김 실장을 놓고 말들이 많은데 7인회가 이제 와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느냐. 모두 박 대통령 잘 되길 바라는 차원”이라며 “박 대통령도 그 마음을 잘 알기에 전적으로 믿고 일을 맡긴 것이다. 김 실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애정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