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30일과 10월 1일 이틀간에 걸쳐 동양그룹의 비금융 핵심계열사 다섯 곳이 잇달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증권가에서는 동양증권 등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하고 있는 금융계열사들 역시 악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며 동양그룹의 해체까지 전망하고 있다.
동양증권 임직원 200여 명이 지난 3일 서울 성북구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자택 앞에서 동양시멘트 법정관리 철회를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계열사 법정관리를 신청한 후 동양그룹 한 임원이 밝힌 소회다. 동양그룹 법정관리 신청 소식이 전해지자 재계와 금융권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현재현 회장을 비롯해 동양그룹 관계자들은 “법정관리는 없을 것”이라며 사태 수습을 자신했다. 그러나 주말이 지나자마자 9월 30일 월요일 오전 (주)동양과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이 동시에 법정관리를 신청함으로써 금융권과 투자자들을 한순간에 ‘멘붕’ 상태로 몰아넣었다.
지난 9월 23일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이 동양에 대한 “지원 불가” 입장을 밝히면서 동양의 ‘마지막 카드’마저 무산되자 동양을 바라보는 금융권 시선은 싸늘했다. 그러나 9월 24일 동양 측이 고 이양구 창업주 부인이자 현 회장의 장모인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이 1500억 원가량의 오리온 주식을 동양네트웍스에 무상증여했다고 밝히면서 주가가 일제히 반등했다. 현 회장 역시 9월 26일 “(계열사) 법정관리 신청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불과 나흘 후인 30일 아침, 그것도 주식시장이 개장하기 전 법정관리 신청 소식이 전해지면서 투자자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투자금을 전부 날릴 위기에 처했다.
동양 회사채 투자자들의 손해도 불가피하다. 시장에서는 동양 회사채와 CP(기업어음)에 투자한 개인 투자자가 무려 4만~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 9월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발행한 회사채와 CP 투자자의 90%가량이 동양증권 창구를 통해 투자한 개인투자자로 알려져 있어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회사채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식 직접 투자의 위험성을 두려워해 안전한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괜찮다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법정관리 신청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한 동양그룹 투자자가 내뱉은 분노의 일성이다. 물론 투자자들에게도 잘못이 없지는 않다. 동양그룹 위기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 터에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인 회사에 투자했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 오너와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가 불거진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5개 계열사를 법정관리 신청을 하기까지 동양의 행보를 들여다보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진작부터 유동성 위기를 경고해온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과연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 적지 않다.
지난해 말 동양은 금융과 시멘트, 발전사업을 제외하고 계열사와 자산을 막론하고 돈 되는 것이라면 전부 매각, “2013년 6월까지 2조 원가량의 현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일각에서 “제스처에 불과할 것”이라는 불신감을 보내기도 했으나 동양 측은 “제스처에 그칠 것이라면 기간과 대상을 분명히 못 박았겠느냐”며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말뿐, 실제로 눈에 띄는 작업이 없었다. 동양시멘트가 보유하고 있던 선박과 레미콘공장 등을 매각해 수백억 원을 마련한 것이 고작이었다. 당장 빚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데 큰돈을 마련할 수 있는 계열사·자산 매각은 지지부진하거나 “싸게 팔 수 없다”며 버티기 일쑤였다. 동양매직 매각 과정이 대표적이다.
동양그룹 본사 전경. 구윤성 인턴기자
동양의 파일사업부를 동양시멘트 100% 자회사인 동양파일에 넘기는가 하면, 동양레저의 경기도 안성 웨스트파인CC 골프장을 동양네트웍스에 매각하는 등 자산을 외부에 팔아 자금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계열사에 양도하는 형태로 ‘돌려막기’를 했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동양의 구조조정 의지에 ‘진정성이 없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재계 관계자는 “팔더라도 훗날 찾을 기회를 엿보는 터에 제대로 매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파이어세일(급매)이어도 팔릴까 말까인 상황에서 제값 받겠다고 고집부린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구조조정에 대한 현 회장과 경영진의 진정성에 의심이 가기에 충분했다.
현 회장과 경영진이 몰두한 것은 회사채 발행이다. 신용등급이 ‘투기등급(BB)’이면서도 동양은 올해 들어서만 수차례에 걸쳐 수천억 원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지난 9월에는 신용등급이 ‘B+’로 더 내려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9월과 10월 만기도래하는 회사채를 차환하기 위해 또 다시 650억 원어치의 회사채 발행을 추진했다. 당초 약속한 대로 계열사·자산 매각으로 현금을 마련해 빚을 갚기보다 회사채 발행을 통한 또 다른 빚을 마련해 다른 빚을 막는 ‘돌려막기’에 치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양 측은 “대비 없이 회사채를 잇달아 발행하겠느냐”며 시장의 우려에 대해 반박했다.
증권 계열사를 통한 불완전판매도 논란이 되고 있다. ‘싱글에이(A)’ 등급도 판매하기 쉽지 않은 시장에서 ‘더블비(BB)’ 등급 회사채를 수천억 원어치 판매할 수 있었던 데는 계열사인 동양증권을 통한 ‘억지 판매’와 투자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불완전판매’에 기인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웅진 사태 이후 회사채 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에서도 동양이 회사채를 거듭 발행해 우려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며 “곧 터질 시한폭탄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동양증권은 모그룹 회사채를 개인투자자들에게 계속 판매해온 것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웅진에 이어 STX, 동양이 연이어 무너지면서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은 쉽지 않게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증권 계열사를 통한 회사채 발행을 지적할 때마다 동양 측은 “법적으로 문제될 것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 같은 문제점이 제기되자 금융위원회는 지난 4월 증권 계열사가 투자부적격 등급 계열사의 회사채·CP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융투자업 규정을 개정, 오는 10월 23일부터 이를 시행할 예정이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으나 이는 달리 말하면 10월 23일 전까지는 동양증권이 투자부적격 등급인 계열사 회사채·CP를 판매해도 괜찮다는 얘기가 된다. 동양이 올 들어서 회사채 발행을 남발한 이유 중 하나다. 지난 9월 30일 ‘불완전판매신고센터’를 설치한 금융감독원의 조치 또한 금융위 조치와 마찬가지로 뒤늦은 일이 됐다.
여기에다 동양이 법정관리 직전 계열사 자산을 담보로 CP를 발행한 것에 대해 ‘사기성’이라는 의혹이 거세게 확산되고 있다. LIG건설의 사기성 CP 발행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지난 9월 들어 CP 발행이 집중적으로 이뤄진 데다 추석연휴 직전인 지난 9월 16~17일에도 발행한 것이 의심을 사고 있다. 투자자들의 원성과 신고가 줄을 잇는 가운데 시민단체인 금융소비자원은 동양그룹의 사기성 CP 발행 의혹을 대한 수사를 검찰에 의뢰한 상황이다.
현재현 회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분노와 비난은 극에 달한 상태다. 앞서 언급했듯 법정관리 신청 불과 나흘 전인 지난 9월 26일까지만 해도 현 회장이 직접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부인했다가 번복, 수많은 투자자들을 한순간에 패닉상태로 몰아넣었다. 진작 유동성 위기를 경고하고 하루 속히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음에도 현 회장은 말만 앞섰을 뿐 제대로 실행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정관리 신청 직전까지도 “동양파워까지 매각할 것”이라며 신성장동력을 포기할지언정 그룹 해체와 투자자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리면서 투자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현 회장의 경영능력 부재와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난이 거셀 수밖에 없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