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지난 8월 항소심 첫 공판서 재판부는 양측 변호인단에게 의외의 주문을 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재판으로 해결을 보기보다는 화해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변호인단에게 설득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날선 공방을 벌이던 양측 변호인단은 재판부의 말에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전하겠다”는 대답만 남긴 채 공판은 마무리 됐다.
하지만 재판부의 화해권고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지난 1일 서울고법 민사14부(윤준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두 번째 공판 현장에서 화해의 기류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82)은 재판부에 ‘청구취지 및 항소취지 변경 신청서’를 제출하고 주식인도청구대상 주식 및 부당이득반환대상 금액을 각각 확대하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공격도 한층 더 업그레이드됐다. 항소심 시작부터 줄곧 “선대 회장의 장남인 원고는 상속인으로서 고유권리를 가지며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준 원심 판결은 잘못됐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이맹희 전 회장은 두 번째 공판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의 혼외자녀서부터 ‘승지회(承志會)’까지 그동안 삼성가의 공공연한 비밀로 치부했던 내용까지 법정에서 공개하는 초강수를 뒀다.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이 전 회장 측은 승지회의 존재와 성격을 자세히 설명하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71)의 경영권 승계는 “빼앗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승지회는 1987년 이병철 선대 회장이 타계 직전 향후 그룹의 중요사안을 논의하라며 만든 일종의 협의기구다. 그동안 일부 언론을 통해 승지회의 존재가 알려지기는 했으나 삼성가가 직접 이를 인정하기는 처음이라 눈길을 끌었다.
이 전 회장 측의 설명에 따르면 이병철 선대 회장이 승지회를 구성한 것은 이 회장이 일방적인 경영권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견제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를 증거로 소병해 전 비서실장이 승지회에 포함된 것을 주목했다. 이 전 회장 측은 “소 전 비서실장은 전문경영인으로 승지회에 함께 했다. 이를 통해 가족 구성원의 일방적인 경영권 행사를 통제하려했던 것인데 이건희가 일방적으로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소 전 비서실장의 참여에 대해 또 다른 해석도 내놨다. 이 전 회장 측은 “소 전 실장이 승지회에 포함됐다는 점은 이건희에 대한 선대 회장의 신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또한 선대 회장은 말년까지 친정체제를 고집하며 이건희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등 절대적인 신임을 보이지 않았다”며 “그 사이 이병철 선대 회장은 다른 아들들과도 신뢰를 쌓아가고 있던 상황이었으나 갑작스럽게 타계했고 아무런 협의 없이 이건희가 경영권을 빼앗아갔다”고 밝혔다.
선대 회장의 유지를 두고 양측이 공방을 벌이며 냉랭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와중에 이 전 회장 측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도 공개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혼외자녀’라는 카드까지 꺼내며 이 회장에 대한 신뢰가 두텁지 않음을 증명하려 한 것. 이 전 회장 측은 “장남으로서 선대 회장의 체면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1심 재판에서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희가 선대 회장의 유지를 왜곡하고 이맹희를 마치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고가는 등 명예가 훼손되는 부분이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공개하게 됐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 전 회장 측은 선대 회장이 일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 이태휘 씨(67)를 언급하며 “이태휘 씨는 삼성전관(현 삼성 SDI)과 제일제당 등기이사를 지내며 선대 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선대 회장이 타계하기 전에는 삼성그룹 후계자로 거론되며 재계에서도 경영권 승계자가 바뀌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도 말했다.
더불어 이 전 회장 측은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새로운 주장도 했다. 이 전 회장 측은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선대 회장이 타계하기도 전에 사장단을 삼성본관 28층에 소집했다. 이후 선대 회장이 임종하자 불과 15분 만에 빈소를 빠져나가 회의를 시작했다. 이후 22분 뒤 자신을 차기회장으로 추대하는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고 주장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선대 회장을 애도하며 빈소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회장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빈소도 지키지 않은 불효를 저지른 셈이다. 또한 이 전 회장 측은 “이 같은 전격적인 차기회장 추대는 재계에 유례가 없으며 최소한의 장례절차는 끝내놓고 후임을 논의하는 것이 망자에 대한 예의”라며 원색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1987년 11월 23일 이병철 회장 장례식에 참석한 아들들. 왼쪽부터 고 이창희, 이건희, 이맹희. 이번 공판에서 이병철 회장의 임종 당시 상황을 둘러싼 공방이 오갔다. 사진제공=우먼센스
그러나 이 전 회장 측은 이 회장이 서둘러 경영권 승계를 매듭지은 이후 승지회를 철저히 배제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이 전 회장 측은 “이건희가 회장이 된 이후 조카도 돌보지 않는 등 독단적인 운영을 하는 모습을 보고 상속인 내부구성원 사이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이건희가 선대 회장 타계 직후 빠르게 그룹 전체 경영권을 장악해 승지회는 급속히 무력화돼 조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건희 회장은 경영권을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차명재산의 존재를 형제들에게 철저히 감춘 채 은닉하고 독차지한 결과 오늘의 소송에 이르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 측은 “실체적인 진실에 명백히 반하는 주장”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이 회장 측도 승지회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했지만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되는 입장을 보였다. 승지회가 구성될 때부터 이 회장이 삼성그룹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전제가 있었다는 것. 이에 대한 근거로 승계절차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회장 측은 “승지회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조직은 아니었다. 선대 회장이 생전에 제일합섬 등을 증여하고 이건희 회장이 총수로서 지배하는 삼성그룹 울타리 내에서 원만히 통합경영을 하라는 뜻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계열분리 없이 통합 형태로 주요 계열사는 이건희 회장에게 증여하고 나머지 작은 계열사를 다른 자녀에게 먹고살 만큼만 증여하는 것이 선대 회장의 철칙이었다”면서 “승지회는 오히려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를 전제로 한 모임”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승지회가 두 번의 모임 끝에 해체된 것에 대해서도 이 전 회장 측은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승지회를 무산시켰다”고 밝혔으나 이 회장 측의 입장은 달랐다. 이 회장 측은 “통합경영을 위해 승지회가 구성됐지만 계열 분리를 원하는 일부 상속인들의 반대로 유명무실해졌다”며 논란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다음 기일에 승지회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제출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어 선대 회장의 유지에 대한 이 전 회장의 ‘딴죽’에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회장 측은 “선대 회장의 유지는 이미 1심에서 자세하고 뚜렷하게 드러났으며 재판부 역시 이를 인정했다. 승지회는 자녀들의 원만한 경영활동을 배려한 선대 회장의 ‘투 트랙’ 전략에 따라 운영된 것으로 선대 회장은 신세계 등 일부 계열사를 생전에 이명희 회장 등에 주고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등 주요 사업 부문은 하나로 묶어 이 회장에게 승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덧붙여 “이맹희 씨는 자서전에서도 이병철 회장이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며 그 말을 듣던 순간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고 밝히는 등 이미 경영권 승계에 대한 선대 회장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곤조곤 반박을 이어가던 이 회장 측은 이 전 회장에 대한 공격도 빼놓지 않았다. 이 회장 측은 “이병철 선대 회장이 이건희 회장을 삼성그룹 단독 승계자로 천명한 것은 세상이 알고 있었다. 이는 선대 회장의 자서전이나 일간신문 인터뷰 등 증거와 정황을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맹희도 이건희 회장의 단독상속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맹희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은 재산분할에서 배제됐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양측의 공방이 끝없이 이어지자 재판부는 공판 40여 분 만에 양쪽 모두에 상속 당시 삼성생명 주권 발행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 참칭상속인의 재산권 침해의 범위, 무상증자된 재산을 상속재산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 등에 대해 다음 기일까지 의견 정리를 확실히 할 것을 주문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이에 다음 변론기일로 예정된 오는 11월 5일 오후 2시에 양측은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그동안 준비서면에서 밝힌 내용을 구술 변론할 예정이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생명·전자 차명주식이라도…
이 회장을 상대로 삼성생명 보통주 27만 3000여 주, 삼성전자 보통주 6만 8000여 주를 청구하고 에버랜드에도 삼성생명 보통주 15만 3000여 주로 조정했다. 부당이익반환 청구금액 역시 87억 2000만여 원으로 증가했는데 이에 따라 이 전 회장 측은 항소를 제기하면서 인지대로 4600만여 원을 납부한 데 이어 차액으로 6억 3000만 원을 추가로 법원에 냈다.
이러한 움직임은 1심 재판부가 이 전 회장의 청구에 대해 “상속재산으로 인정된 일부 주식은 제척기간이 지났고 나머지 주식은 상속재산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기각하면서 달았던 단서를 이슈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당시 재판부는 “1989년 이건희 회장이 공동 상속인과 상속분할협의에 의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차명주식을 단독 상속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를 쟁점화시키면 이 전 회장 측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 공판에서도 이 전 회장 측은 “경영권 승계에 차명재산 상속이 포괄적으로 포함된다”는 이 회장의 주장에 대해 “삼성그룹 지배구조 특성을 감안하면 차명주식은 경영권과 무관하다”고 반박했다. 이 회장이 지난해 1월 10일 기준으로 삼성전자 주식 2.94%만 소유한 채 삼성물산, 삼성생명, 삼성화재 등 계열사 보유 우호지분 15.31%를 이용해 삼성전자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의 차명주식을 보유하는 것은 해당 회사의 경영권 확보와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 회장 측은 “원고가 항소취지를 확장했으나 여전히 일종의 ‘시험소송’ 및 항소권 남용 문제가 남아있다. 내용을 보충해 달라”고 요청하며 “선대 회장이 이건희 회장을 삼성그룹 단독 계승자로 천명하고 공동상속인들이 선대 회장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어 이 회장의 단독상속을 인정한 사실은 이미 수많은 증거를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라 재차 강조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