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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이듬해인 1997년, 노무현은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공동운영하던 전/현직의원들과 함께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 돼요?>라는 수필집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방황기를 솔직하게 술회했다.
공사장 막노동 시절 밥값을 떼먹고 도망친 얘기, 일을 하다 다쳐서 입원한 병원에서 간호사를 짝사랑한 이야기, 농업시험장에서 묘목을 훔쳐 살림밑천을 만들었던 얘기 등. 여느 정치인들의 책에서처럼 자신에 대한 미사여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유의 솔직한 입담이 그대로 느껴지는 청년 시절 회고록을 넘기다 보면 ‘서민 대통령’ 구호가 슬로건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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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지난 대선기간 포철을 방문한 노 당선자. 노 당선자의 학창시절, 군복무기간, 사법 연수원 시절의 추억들 | ||
노 당선자가 직접 쓴 부산상고 졸업 직후 첫 직장 얘기다.
청년 노무현은 이 때 산 책과 기타가 자신을 변호사의 길로 이끌 것을, 그리고 ‘기타치는 대통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낳게 할 줄 생각이나 했을까. 노 당선자는 이 책에서 중학교 입학(1960년)무렵부터 권양숙 여사와의 결혼(1973년)때까지 13여년 동안의 얘기를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과 사법시험 사이에서 방황을 하던 시절의 모습.
첫 직장의 월급을 ‘책과 기타, 술과 영화’로 써 버린 뒤 고향에 내려온 스무 살의 노무현은 마을 뒷산에다 토담집을 짓는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공부방이었다. 그가 ‘돌도 직접 나르고 밤에는 남의 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 서까래를 올린’ 집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책 살 돈은커녕 당장 먹고살기도 어려운 처지에 공부가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몇 달 동안의 ‘토담집 수험생’ 생활을 때려치운 그는 그 해 여름, 울산의 공사 현장으로 들어간다. 당시 울산은 ‘서부개척과 같은 바람이 불고 있던’ 곳. 그는 울산의 ‘한국비료’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일당은 1백80원. 하루 세 끼 밥값이 1백5원이었으니 실제 수입은 75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장에서 발에 큰 못이 찔린 그는 더 이상 품도 팔지도 못하게 되자 밀린 밥값 2천원을 떼먹고 다시 고향으로 도망을 쳤다. “어느 날 일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식당 주인 몰래 울산역으로 내달렸다. 그 때 얼마나 뒤꼭지가 당기고 서럽던지….”
고향집에 다시 돌아온 그는 작은 형님 건평씨와 함께 돈 벌 궁리를 했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그 때 생각해낸 것이 바로 감나무 묘목 훔치기. 당시에 대한 회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김해농업시험장에 들어가 감나무 묘목을 훔쳐왔다. 우리 산에다 과수원을 만든답시고 밤중에 몰래 들어가 1백 포기 정도를 뽑아왔던 것이다. 사실 그 때 심은 묘목이 뒷날 우리집의 어려운 살림에 제법 보탬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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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주인은 ‘잘 돌아왔다’며 환대해 주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해 옛날 떼어먹은 밥값도 갚고 4천원 가까이 돈을 모았을 즈음, 그는 또다시 사고를 당하고 만다. 작업을 하다 큰 목재에 얼굴을 맞은 것이다.
이빨이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진 그가 병원에서 정신을 차려 처음 본 것은 시험 합격자 명단. 그는 “그 때의 감격스러운 심정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일단 정신을 차린 병상의 그에게는 또다시 걱정이 생겼다. 바로 치료비였다. ‘산재 보상금’이라는 걸 그 때 처음 안 그는 “훗날 내가 산업재해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는 게 생각해보면 우습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치료비까지 ‘산재 처리’로 해결한 총각 노무현에게 또다른 고민 하나가 생겼다.
예쁘장한 처녀 간호사들에게 자꾸 마음이 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남루한 행색의 그에게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는 것. “하루는 울산의 국세청에 다니는 친구와 대학에 다니던 친구가 면회를 와서 놀아주고 갔다. 그러자 나에 대한 처녀들의 대우가 확 달라져 버렸다. 나는 내심 기뻤다. 그런데 며칠 후 한 아가씨가 오더니 대학에 다니는 내 친구의 주소를 가르쳐달라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실망스럽고 김이 팍 새버렸다. 세월이 지난 뒤 생각해보니, 그 어린 나이에도 상심은 꽤 컸던 것 같다.”
그는 ‘혼자만의 실연’을 달래기 위해 병원에 있는 동안 2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그 중 하나는 퇴원할 때 간호사에게 주려고 했다는 것. 하지만 전하지도 못하고 집에 보관을 하고 있다가 언제부턴가 잃어버렸다고 한다.
방황과 상처와 좌절의 연속이었던 당시의 삶을 그는 뒷날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때의 노가다 생활을 돌이켜 보면 환경에 따라서 사람이 얼마나 파렴치해지고 거칠어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맨날 모였다 하면 화투요, 입을 열었다 하면 욕이다. 옛날에 누구를 두들겨 팬 이야기며 여자 겁탈한 이야기, 일 저지르고 도망친 일 등등….”
그런 그 역시 거친 환경 속에 익숙해져갔다. ‘노가다판의 노무현’을 스스로 회상한 일화 하나. “한 번은 (일행들이) 일터로 나가는 길에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을 음담패설로 희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들도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욕만 됫박으로 얻어먹고 코가 납작해져 버렸다. 분풀이 할 궁리 끝에 다음 날 아주머니들이 지나가고 있는 길거리를 향해 나란히 줄지어 서서는 바지춤을 내렸다. 그리곤 단체로 오줌을 갈겨댔다. 밥 먹고 생각하는 거라곤 그런 것뿐이었다.”
이 책을 쓴 97년 당시 노무현은 치기어린 장난을 함께 친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회의원이 된 후에 전국일용노동자조합 위원장을 여러 번 만나고 도와주기도 했다. 옛날 그 기억 속의 노동자와는 전혀 다른, 당당하고 의젓한 모습이었다. …버려진 사람들에게 도덕적 성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들을 사회의 책임있는 주체로 참여시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관심과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그는 두 달 뒤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 그가 체험한 막노동, 그 경험을 가감없이 털어놓은 솔직함, 그리고 의원시절에 밝힌 ‘그들’에 대한 생각이 그가 펼칠 현실 정치에서 얼마나 배어나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