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장으로 통하는 김기춘 비서실장(아래)과 차기 대표로 거론되는 김무성 의원(위) 사이에 파열음이 새오나오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김 의원의 경남중학교 선배이기도 한 김 실장은 부임 후 ‘부통령’으로까지 불리며 단숨에 청와대를 장악했다. 김 실장은 청와대에 들어오자마자 친정체제 구축을 우선 과제로 천명하며 광폭 행보를 보였다. 야당은 양건 전 감사원장, 채동욱 전 검찰총장 낙마 배후로 김 실장을 지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 실장이 사정라인을 ‘우군’으로 채우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태란 얘기다. 실세 중 실세로 평가받던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조차 김 실장을 중심으로 한 청와대 참모진과 갈등을 빚은 뒤 물러났다는 관측도 김 실장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김 실장 임명 이후 청와대만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당·청 관계 역시 빠른 속도로 변했다. 새누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사석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파워의 세기를 놓고 비교해보면 예전 청와대가 6, 당이 4였다면 지금은 9 대 1, 아니 9.9 대 0.1이라고 보면 된다”면서 “김 실장이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전했다.
‘정치 초짜’인 박준우 정무수석을 임명한 것을 놓고서도 새누리당 의원들 사이에선 ‘김 실장이 사실상 정무수석 역할까지 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앞서의 새누리당 의원은 “솔직히 김 실장 말 한마디면 당 지도부가 움직이는 게 현실”이라며 “청와대가 당을 보조기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힘의 무게추가 청와대로 기울자 새누리당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황우여 대표를 향해서는 ‘바지사장’이라는 비아냥거림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기류는 특히 김무성 의원 주변에서 확연하게 포착되고 있다. 지난 9월 1일 김 실장이 새누리당 원내대표단을 자신의 공관으로 불러 만찬을 베푼 것을 놓고 김 의원 측 몇몇 인사들은 공공연히 “김 실장이 당을 우습게 알고 있다”며 쓴소리를 내기도 했다.
김 의원과 가까운 새누리당 관계자는 “김 실장이 여권의 큰 어른인 것은 인정한다. 김 의원도 선배인 김 실장을 잘 따른다”면서도 “그렇다고 김 실장이 당을 좌지우지하려 해선 안 된다. 청와대와 당은 수평적 협력 관계가 유지돼야 한다. 김 의원도 그 점에 대해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서청원 전 대표 공천 이후 김 의원 측 분위기는 더욱 강경해진 모양새다. 정치권에선 서 전 대표 공천이 김 의원 독주를 막기 위한 청와대 작품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김 의원 측 역시 공식적으론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서 전 대표 공천 후폭풍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 의원 정치 행보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승승장구했던 김 의원으로선 ‘친박 중진’ 서 전 대표가 원내로 들어올 경우 양보 없는 싸움을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 의원 측이 서 전 대표 공천에 개입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김 실장에게 이를 갈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풀이되고 있다.
이처럼 김 실장의 강공 드라이브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김 의원 측은 ‘이대로 당할 수 없다’며 여러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측근들은 김 의원이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울 경우 차기 주자로서 부각될 것이라며 정면 승부를 주장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김무성계’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김 의원도 이제 자기 정치를 해야 할 때다. 지금 밀리면 내년 전당대회도 장담할 수 없다”면서 “김 의원으로선 정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지금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청와대가 김 의원을 때리면 때릴수록 김 의원에겐 유리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상대로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하며 지지율을 끌어올렸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에선 김 의원이 지난 10월 10일 제출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눈여겨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근혜노믹스’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청와대 내부에서는 복지 공약 이행을 위해 증세를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김 의원은 법안에서 증세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다. 또 재정건전성을 위해 복지를 줄일 수도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김 의원은 “박 대통령 공약은 4.5% 수준의 경제성장을 가정했는데, 실제 성장은 이에 크게 못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세금이 안 들어오는 상황에서 (복지 공약을) 지키게 되면 다른 분야가 허물어진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이 차기 당 대표로 유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복지를 놓고 마찰을 빚을 수도 있음을 추론케 하는 대목이다.
김 의원 측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김 실장 측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과 함께 불쾌감을 내비치고 있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김 실장에게 무슨 사욕이 있겠느냐. 다 박 대통령 잘 되라고 하는 것 아니냐”면서 “김 의원 측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김 실장 이름을 자꾸 거론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주장했다.
7인회 소속 원로 인사의 한 최측근은 김 의원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김 의원은 4월 재·보선을 통해 국회로 들어온 후 세 모으기에 나섰다. 지금은 새누리당 의원들이 다 김 의원 눈치를 보고 있다”면서 “그 어떤 대통령도 임기 초반 집권당 실력자의 이러한 행태를 두고만 보지 않는다. 김 실장이 나선 것도 그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김 의원 스스로 초래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실장과 김 의원 간에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신경전에 여권에서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박 대통령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권 실세들 간 파워게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대통령이 국정을 원활히 운영하기가 힘들다. 이명박 정권 초반 ‘개국공신’이던 박영준 전 차관과 정두언 의원 간에 벌어진 권력 다툼의 후유증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간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김기춘 실장이나 김무성 의원 모두 여권 최고 실세다. 결국 박 대통령이 매듭을 풀어야 할 문제”라면서 “김 실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만사형통으로 불렸던 이상득 의원과 비교할 수 있다. 다른 점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이 의원에겐 정적이 없었지만 김 실장에겐 새누리당에서 절대적인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김 의원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