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덕 신부는 한국에서 47년간 훌륭한 책과 영화를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1965년 9월 경북 칠곡군의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에 파견된 그는 ‘임인덕’이라는 한국이름을 지었다. 나무의 의미가 있는 독일 본명을 따라 성은 수풀 림(林)으로 하고, 한국인 정서에 영향을 준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에서 ‘인’과 ‘덕’을 따서 이름으로 삼았다.
임인덕 신부는 경북 성주 본당과 점촌 본당에서 주임으로 10개월간 사목 활동한 것을 제외하고는 출판, 영화 상영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려 했다. 문화선교를 적극적으로 펼친 베네딕도 선교회에서도 임 신부를 적극 지원했다.
1966년 한국 왜관에 도착한 임인덕 신부(오른쪽 두번째).
1970~1980년대 당시 군부 정권의 미움을 산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정보기관의 담당 형사가 붙는 등 감시가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전화 도청을 피하기 위해 독일인 신부끼리 라틴어로 통화했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임 신부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럼에도 그가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1982년 분도출판사에서는 사진작가 최민식 씨를 지원해 빈민층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을 펴냈다. 그러자 당시 문화공보부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담당자는 임 신부에게 “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왔다. 많이 잘라내든 불태우든 해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임 신부는 “그렇죠? 좀 어둡게 나왔습니다. 안 그래도 다시 인쇄를 할 참이었습니다”라고 웃으며 응수했다고 한다. 결국 최민식의 사진집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킨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해 외국에서 판매될 수밖에 없었다. 임 신부는 1993년 분도출판사의 사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20여 년 동안 400여 권의 책을 펴내 한국 출판계에 많은 기여를 했다.
보좌신부로 처음 부임한 성주 본당에서 젊은이들과 야유회를 하는 모습.
1994년에는 ‘베네딕도 미디어’를 담당하면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유럽 거장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 출시하는데 앞장섰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와 <잠입자>,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십계> 시리즈,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 <산딸기> 등이 모두 베네딕도 미디어를 통해 한국에 처음 출시된 작품들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신념은 지난 2005년 주교회의 매스컴 위원회에서 공로패를 받았을 때 말한 소감에서 잘 나타난다.
출판과 시청각 교육 등을 담당할 당시 그의 집무실 풍경.
‘금강산 내산전도’ 등 겸재 정선의 그림 21점이 담긴 화첩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임 신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1925년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금강산 여행 도중 반해 구입한 이후 화첩은 그동안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 신부의 설득 끝에 2005년 겸재 정선의 화첩은 한국으로 반환됐다. 현재 화첩은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31세의 나이로 한국에 첫발을 내딛은 임 신부는 2년 전 건강이 악화돼 치료를 위해 45년 만에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떠나는 순간까지 몸 상태가 호전되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돌아오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13일 독일의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지병으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음의 그 순간까지도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임인덕의 장례미사는 지난 16일 독일의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봉헌됐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