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의 “돈을 갚았습니다”라는 말에 재판장은 “변제란 소리야?”하고 다그치는 사례도 봤었다. “돈을 갚았다니까요”라고 하는 말에 다시 재판장은 “그게 변제냐 아니냐를 묻는 거야”라고 화를 내는 광경도 봤었다. 유학 갔다 온 법조인 중에는 입만 열면 특수 전문영어가 튀어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건 완전히 외계인의 언어였다.
둘째 질문은 ‘재판부는 말을 집중해서 듣던가요?’였다. 자기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는 판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법적 관점은 현실을 보지 못하는 맹점이기도 했다.
‘재판장이 한쪽 편에 기울지 않고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했나요?’가 셋째 질문이다. 사건이 터지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판사를 자기편으로 하려는 로비전이 있었다.
‘재판장이 화를 내거나 핀잔을 주지 않고 부드럽게 재판을 진행했나요?’가 다음 질문이다. 핀잔 정도가 아니라 변호사인 나도 심한 모욕을 당한 경험이 있다. 교만한 판사는 자신이 왕인 줄 안 시절이 있다.
다음 질문은 ‘충분한 변론기회가 주어져서 의도한 대로 변론이 이루어졌습니까?’였다. 시간에 쫓기는 판사들은 장황한 변론을 싫어했다. 몇 분의 변론도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밉보이면 결과가 나쁠 수 있기 때문이다. 석궁을 들고 재판장을 찾아가 쏜 교수도 그런 종류의 불만이다. <부러진 화살>이란 영화에 압축되어 있다. 원인은 별게 아니었다.
질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자신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어 재판부가 그 내용을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상 본질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악덕 사채업자가 받은 각서와 대여금 주장은 잘 전달되는데 가난한 사람의 피눈물은 법률요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된다.
‘재판이 지연되지 않고 신속하게 진행됐습니까?’ 대법원에 상고하면 언제 판결이 선고될지 모른다. 그건 법원이 더 잘 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써서 함 속에 넣게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질문이 바로 답이었다. 판사들이 그렇게 재판하면 된다. 설문지에서 법원의 조용한 변화를 느꼈다. 그렇지만 그건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다. 판사들에게는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이 우리를 이해하고 존경하고 설득해야 해’라는 잠재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걸 느껴왔다. 중심이 국민이 아니고 법관이었다.
내면에는 ‘나는 너와 달라’라는 의식도 있다. 잘났으니까 당연하다. 깍듯한 예의 속에 냉정한 거부가 공존해 있다. 한번 마음먹으면 그 머리 안에 다른 게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 설문지는 사법부가 귀를 열고 들으려는 낮아짐의 태도였다. 법원이 겸손할 때 국민은 법관을 올려볼 것이다.
변호사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