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는 혈액암 투병생활을 하던 중에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만큼은 어디서 기운이 펄펄 나는 건지 청춘이 돌아온 기분”이라고 말했다.
어릴 적 김 교수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책벌레’가 그것이었다. 학교조회나 체조시간 때면 대신 책을 읽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주류도매업 사업을 했던 아버지 덕에 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원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생전 김 교수는 “병약한 시절이 없었더라면 제 자신의 오늘날 인생이란 없었을 것”이라고 그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다.
‘책벌레’ 김 교수는 1963년 ‘김정반’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현대시의 언어적 미망’을 출품해 당선되면서 데뷔하게 된다. 김 교수는 자신이 글을 쓰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죽음의 글’이었다고 했다. ‘죽음의 글’은 경남 서부에 존재하는 ‘언문 제문’이라는 풍속을 뜻한다. 이는 시집간 딸들이 친정 집 초상에 와서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이렇게 사시다 돌아가셨다’하는 내용의 글을 지어 와서 제문을 읽는 풍속이다.
김 교수는 ‘고성의 여자 문필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는 어머니의 ‘언문 제문’을 “슬픔, 고통, 회한을 풀어나가던 죽음의 글이 드디어는 달램의 웅얼거림으로 끝맺곤 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김 교수가 2002년 <동아일보>에 1년간 연재한 ‘웃음의 인생학’이라는 칼럼에는 ‘죽음’과 ‘웃음’의 코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하고많은 사람 죽고는 저승 갔지. 한데 돌아오는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보았던가? 그 세계가 얼마나 좋으면 다들 안 돌아오겠나”라는 농을 소개하며 “죽음을 웃음으로 대하는 마음의 여유면 연옥 아니라 지옥에 가서도 천당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한 것은 김 교수가 생각하는 ‘죽음론’의 정수를 잘 보여주는 예다.
김 교수의 어머니가 김 교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면 평생을 연구에 매진한 민속학, 한국학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은 할머니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던 김 교수는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민속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여행을 좋아해 전국 팔도와 해외를 누비고 다니며 만난 각 지역의 사람들과 풍습,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도 민속학 자료를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그는 이렇게 모은 자료를 토대로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집필했다. 회갑을 한 해 앞둔 1991년, 김 교수는 30년간 몸담았던 대학 강단을 뒤로하고 아내 정상옥 씨(76)와 귀향했다. 그 뒤로 고인은 70권 가까이 책을 썼다. 귀향기인 <빈손으로 돌아와도 좋다>, 욕의 풍속사와 사회학적 의미를 고찰한 <욕: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사라져가는 우리네 풍경과 정서를 담은 <이젠 없는 것들>, 2008년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올해의 청소년 도서’로 꼽은 <독서>는 고인이 경남 고성군 하일면 자란만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쓴 책들이다.
김열규 교수는 고향 경남 고성군 하일면 자란만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책을 썼다.
고향으로 돌아간 김 교수는 주민들을 위해 매달 문화강좌를 열었다. 강의는 문학과 건축, 농사법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김 교수와 함께 20여 년간 고향에서 문학 활동을 한 정해룡 시인은 “고인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시고 난 후 고성 땅에 그야말로 ‘문화의 기적’이 일었다. ‘고성문화사랑’을 시발점으로 각종 문화단체가 태동했다”고 평가했다.
정해룡 시인은 숨을 거둔 김 교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지인이다. 정 시인은 김 교수를 ‘투병 중에도 생에 대한 활기가 넘쳤던, 니체와 괴테와 릴케를 사랑했던 분’으로 기억했다. 정 시인은 “혈액암 완치판정을 받고 6번 중 2번의 항암치료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그날(사망하기 하루 전)도 함께 병원에 들렀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항암치료를 다 마치면 같이 책을 한 권 공동으로 집필하자는 말씀도 하셨다”고 말했다.
사망하기 하루 전인 21일 김 교수는 아픈 아내를 대신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하지만 22일 아침 여느 때처럼 정 시인이 김 교수의 집을 찾았을 때 김 교수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정 시인은 “집안 일을 돌봐주는 아주머니 얘길 들어보니 21일 점심을 먹은 후부터 계속 집필에 몰두하셨다고 하더라. 아침에 방을 돌아보니 A4용지에 초고가 휘갈겨져 있었다. 혹시나 컴퓨터로 작업을 하셨나 싶어 PC를 켜보니 전날 A4용지 71장 분량의 초고 퇴고 작업을 하셨더라. 나도 젊지는 않지만 A4용지로 10매 탈고하기도 힘들다. 안정을 취하셔야 했는데…”라며 말을 줄였다.
삼천포의 한 이비인후과에서 혈액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갔던 김 교수는 10월 22일 아침 생을 마쳤다. 김 교수는 암 판정 이후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을 가장 답답해했다고 한다. 매일 새벽 5시 반쯤이면 책상 앞에 앉았다는 김 교수는 생의 마지막까지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라는 질문에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연구하면서 동시에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했던 사람으로 기억해주시면 좋겠다. 그 덕에 책을 자그마치 70권도 넘게 썼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라고 말했다. 평생의 좌우명이 ‘오직 일하라’였다는 김 교수는 이제 평생의 과업이었던 글을 놓고 영면에 들었다. 김 교수의 장례미사는 지난 25일 서강대 성당에서 이루어졌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