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압승으로 끝난 재보선 결과가 박 대통령의 자신감 회복 수준을 넘어 ‘오판’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10월 27일 박 대통령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더욱이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두 곳 중 경기 화성갑 선거구에는 친박계(친박근혜계) 원로인 서청원 전 당대표가 후보로 나섰다. 자칫 ‘서청원 대 야당 후보’가 아니라 ‘박근혜 대 야당’의 프레임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재·보선 바로 다음날 열린 청와대 회의 분위기가 왜 그렇게 화기애애했는지 이해하고도 남을 만하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박 대통령의 회의 모두발언도 당초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 그동안 경제부흥을 비롯한 4대 국정기조를 추진하면서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한 해가 지금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여전히 과거의 정치적 이슈에 묶여서 시급한 국정현안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다.”
이렇게 말문을 연 박 대통령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등 최근 현안에 대한 입장을 쏟아냈다. 1주일 전인 지난 10월 22일 국무회의에서는 현안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침묵 정치’를 이어갔던 박 대통령이지만, 이날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이 사건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는 데 2분여의 시간을 할애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작심하고 준비해서 내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우선 “현재 재판과 수사 중인 여러 의혹들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확실히 밝혀 나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의혹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민들께 정확히 밝히고 책임을 물을 것이 있다면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어 “정부는 철저한 조사와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는 대로 불편부당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고 재발 방지책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앞으로 모든 선거에서 국가기관은 물론이고 공무원 단체나 개별 공무원이 혹시라도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지켜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대통령은 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한 의혹들에 대해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내놓은 셈이다. 이는 논란을 자초한 국정원 등 국가기관에 대한 강도 높은 책임 추궁과 개혁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국정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도 없고 이용한 적도 없다”며 이번 사건이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했던 과거 입장에 비하면 상당한 변화가 느껴진다.
더욱이 11월 2일부터 6박8일 일정으로 프랑스, 영국, 벨기에, 유럽연합(EU) 순방에 나서는 박 대통령이 이날 회의에서도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적지 않았기에, 이날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은 한결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전날 재·보선 결과에 고무된 박 대통령이 그동안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자신감 있게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정면돌파를 시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3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국정원 댓글 논란과 관련한 입장을 밝혔다. 사진제공=청와대
특히 박 대통령이 이날 회의에서 야당을 비판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박 대통령은 “사법부의 판단을 정치권이 미리 재단하고 정치적인 의도로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 이상 국론 분열과 극한 대립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다. 박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터넷으로 모든 상황이 공유되고 실시간으로 많은 정보들이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가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우리 국민들도 진실을 벗어난 정치 공세에는 현혹되지 않을 정도로 민도가 높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에게 야당은 여전히 ‘사법부의 판단을 미리 재단하고 정치적인 의도로 끌고 가는 세력’, ‘진실을 벗어난 정치 공세를 펴는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당으로선 발끈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각종 의혹들에 대해 유감 표명을 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선에서 멈췄어야 했다”며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야당의 협조 없이는 각종 민생법안과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구태여 대통령이 야당을 자극할 이유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이런 박 대통령의 과도한 자신감이 ‘2인자 정치’와 맞물릴 경우 대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민생경제와 세일즈 외교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밝혀 온 박 대통령이 대야 관계 면에선 강성으로 분류되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서청원 의원 등에게 힘을 실어줄 경우 파열음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8월 김기춘 비서실장이 청와대에 입성한 이후 양건 전 감사원장,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 채동욱 전 검찰총장 등이 잇따라 사퇴했다. 이들의 사퇴 과정은 하나같이 매끄럽지 못했고, 김 실장과 홍경식 민정수석, 최원영 고용복지수석 등 이른바 ‘김기춘 사단’이 배후라는 의혹이 계속돼 왔다. 양 전 원장에 대해서는 ‘전 정권 인사 찍어내기’라는 얘기가, 진 전 장관 사퇴 때에는 ‘장관이 청와대 비서실에 막혀 대통령 면담도 못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채 전 총장의 혼외자식 논란이 불거진 과정 역시 청와대와 무관치 않다는 의혹의 시선도 여전하다.
서청원 의원이 김 실장처럼 적극적인 역할에 나설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여당인 새누리당이 ‘청와대 여의도 출장소’ 수준을 넘어 ‘청와대의 돌격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 야당 관계자는 “재·보선을 통해 일선에 복귀한 서청원 의원이 박심(朴心)을 등에 업고 2인자 정치에 나선다면 그 파장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선거를 앞두고 ‘설마 서청원을 공천하겠느냐’는 예상이 깨졌던 것처럼 박 대통령이 서 의원을 내세워 여의도 정치에 개입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