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의 거센 사퇴 압박에도 완강히 버티던 이석채 회장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는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 때문으로 관측된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이러한 기류를 감지한 사정기관들은 이 전 회장과 관련된 첩보들을 경쟁적으로 생산했고 이 가운데 일부는 청와대 민정라인이 직접 확인 작업까지 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건 중 상당수도 올해 초 첩보 형태로 보고됐던 내용들이다.
정권 차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 전 회장은 버티기로 일관했다. 이 전 회장은 사퇴설이 불거질 때마다 “임기를 채울 것”이라며 일축했다. 오히려 이 전 회장은 친박 인사들을 영입하며 현 정부와의 ‘소통’을 시도했다.
이 전 회장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캠프의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홍사덕 민화협 상임의장(KT 경영고문), 공보단장 김병호 전 의원(KT 경영고문), 김종인 전 경제민주화추진단장(KT 경영자문)을 ‘스카우트’했다. 이를 두고 비난 여론이 일자 친박계인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정부 차원에서 개입해서 발생한 일이라기보다는 KT 인사권자가 개인적 목적으로 단행한 것 아니냐”며 이 전 회장을 겨냥하기도 했다.
청와대가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 전 회장 사퇴를 밀어붙이기로 결론을 내린 것은 지난 8월 말경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한 언론은 “조원동 경제수석이 ‘박근혜 대통령의 뜻’이라며 이 전 회장에게 사퇴를 종용했고 이를 이 전 회장이 ‘장수의 명예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물러날 수 없다’며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논란이 일자 청와대는 “그런 적이 없다”며 부인하긴 했지만 내부에선 불쾌감을 털어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 회장이 ‘언론 플레이’를 했을 것이란 주장이 제기됐던 것이다.
이 전 회장을 대하는 청와대 분위기의 변화는 검찰 움직임에서 잘 읽을 수 있다. 이번 검찰 수사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지난 2월 이 전 회장이 여러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회사에 수백억 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가 있다며 고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수사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이 전 회장에 대한 수사 의지가 없는 것 같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고위 인사는 “이 전 회장 정도 되는 거물급 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암묵적으로 청와대 재가가 필요하다”면서 “(이 전 회장을) 조금 더 지켜보자는 뜻이 검찰에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지난 10월 10일 참여연대의 두 번째 고발장(이 전 회장이 KT 소유 부동산을 헐값에 매각했다는 혐의)을 접수한 검찰은 이례적일 만큼 신속하고 강도 높은 수사에 나섰다. 이 전 회장 수사를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부장검사 양호산)는 수사 착수 10여 일 만인 10월 22일을 시작으로 31일, 11월 11일 세 차례나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앞서의 서울중앙지검 고위 인사는 “수사팀이 거의 매주 압수수색을 나간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며 “이는 검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가 이 전 회장 수사에 대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원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참여연대가 고발장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 전 회장의 배임 및 횡령 혐의에 대한 부분뿐 아니라 이 전 회장 개인 비리로까지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수사팀 관계자는 사석에서 “이 전 회장 배임이나 횡령은 수사의 시작일 뿐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서 “압수수색 한 번 나갔다 올 때마다 새로운 게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일각에선 이 전 회장 수사가 대검 중수부 폐지 이후 검찰의 정예로 통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로 이관될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우선 검찰은 이 전 회장이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자금을 파헤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자료들에서 KT 경영진들이 별도의 통장을 만들어 거액을 관리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이 통장을 사실상 이 전 회장 차명 보유로 보고 있다.
이 회장의 사표가 수리된 지난 12일 서초동 올레캠퍼스에서 진을 치고 있는 취재진들의 모습. 구윤성 인턴기자
검찰은 이 전 회장이 조성한 비자금 중 일부가 정치권으로 흘러간 정황도 포착했다. 이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향후 ‘게이트’로 번질 수 있음을 추론케 하는 대목이다. 통신업계의 한 고위인사는 “이 전 회장은 재계에서 대표적인 마당발로 꼽힌다. 또 오랜 기간 고위직을 지내면서 정·관계에 구축한 인맥도 상당하다”면서 “검찰이 이 전 회장 비자금을 건드린다면 타격을 받을 유력 인사들이 꽤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예의주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도 “이 전 회장은 이명박 정권에서 낙하산으로 KT 수장이 되긴 했지만 야권에도 친분이 있는 의원들이 제법 있다”면서 “정치권 로비가 사실이라면 그 폭발력은 엄청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검찰은 이 전 회장이 연임을 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로비를 했다는 첩보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2009년 1월 취임한 이 전 회장이 지난해 3월 연임을 하는 과정에서 정·관계 인사들에게 금품을 전달했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검찰은 이 전 회장이 이명박 정부 실세였던 전직 차관급 인사에게 해외여행과 출장, 자녀유학경비 등의 명목으로 수십만 달러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수사 중이다.
또한 이 전 회장이 야당 의원과 관련이 있는 한 업체에 특혜를 주라고 지시했다는 진술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러한 일들이 이 회장의 연임 로비 차원에서 이뤄졌을 뿐 아니라 조성된 액수를 감안했을 때 다른 사례들이 더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복수의 검찰 관계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 때 방송통신업계 거물로 통했던 A 씨 이름이 계속 나오고 있다. A 씨와 이 전 회장 간 커넥션을 들여다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정치권에선 검찰이 박근혜 정부의 여권 인사들에게도 메스를 댈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전 회장이 친박 실세들과 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검찰이 KT 내 CR(Corporate Relations·대외협력)본부 임원들을 소환조사한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CR본부는 이 전 회장이 대관 및 정보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지난 8월 CR지원실을 확대 개편해 출범시킨 조직이다. 이 전 회장은 CR본부 산하에 CR협력담당을 새로 둬 국회 등을 비롯한 대외기관과의 협력 기능을 강화하기도 했다. 회사 안팎에선 CR본부가 이 전 회장 사퇴를 막고, 검찰 수사를 대비하기 위한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돈 바 있다.
검찰 수사팀 관계자는 “CR본부 직원들이 어떤 업무를 했는지, 또 누구를 접촉했는지를 파악하고 있다”면서 “이 전 회장이 지난해 연임을 하기 위해 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박근혜 정부 실세들에게도 접근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 전 회장이 현 정권의 사퇴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로비를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검찰·청와대·정치권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현재 친박 중진급 인사 B 씨가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B 씨는 현 정부에서 이 전 회장에게 우호적인 목소리를 냈던 정치인 중 한 명이다. 또 실제로 이 전 회장 교체의 부당함을 청와대 측에도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B 씨를 수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비관론도 적지 않다. 앞서의 민주당 의원은 “정치권에선 B 씨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B 씨를 수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김기춘 비서실장이 사정기관 친정체제를 구축한 후 KT 수사가 전격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수사는 여권 핵심부 의중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