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학원가 전경. 내년엔 순경, 시간제 공무원, 사회복지직 등 각종 분야에서 대규모 채용을 앞두고 있어 응시생들이 몰리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쌀쌀한 늦가을 바람이 부는데도 맨발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학원 밖으로 나온 20대 중반의 한 여대생. 한 가닥으로 질끈 묶은 머리와 화장기 없는 모습은 노량진에서 흔히 마주치는 공시생들의 ‘민낯’이다. 그는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휴학을 했다. 취업도 안 되는데 졸업을 하고 백수로 지내자니 부모님께 눈치 보여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고 말하고 노량진 고시원으로 이사 왔다. 아는 게 없어 일단 종합학원에 등록해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있다. 이제 10개월 밖에 안 됐으니 그리 초조한 마음은 없다”며 담담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고시원과 학원만을 오가는 여대생의 모습은 노량진에선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20대 초중반의 공시생들을 찾기란 쉽지 않았지만 이젠 완전히 그 판도가 바뀌었다. 수도권 대학에 합격했더라도 취업이 보장되는 학과가 아니면 일찌감치 입학과 동시에 노량진에 입성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면서 공시생들의 평균 연령도 상당히 낮아지고 있다. 여기에 지방대생들도 방학 때마다 곧장 노량진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어린 공시생 군단의 몸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70년대 통기타에서 90년 서태지에 이르기까지 청춘들을 지배하던 문화 아이콘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입시-취직 경쟁은 가히 살인적일 정도로 청춘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시대 변화는 한창 꿈을 꿔야할 대학생들이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앞서의 한 여대생 말처럼 ‘마땅히 할 게 없는’ 취업준비생들에게 공무원시험 준비는 어쩔 수 없는 현실도피처가 됐다. 합격만 하면 평생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으니 몇 년을 공부하더라도 손해는 아니라는 계산도 뒤따른다.
진입장벽이 낮아진 것도 ‘공무원 러시’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9급 공무원의 경우 행정학개론과 같은 전문 과목보다 비교적 쉬운 수학 과학 사회 등 고교 과목도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학력에 구애받지 않고 도전을 할 수 있게 된 것. 최근 나이제한까지 완화되면서 뒤늦게 공시생의 길로 뛰어든 사람도 적지 않다. 게다가 내년엔 순경, 시간제 공무원, 사회복지직 등 각종 분야에서 대규모 채용을 앞두고 있어 공무원을 꿈꾸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노량진 베테랑 강사들은 “진짜 공부하는 공시생들은 눈빛, 걸음걸이부터 다르다”며 그들은 대체로 1년 안에 합격해 노량진을 떠난다고 한다. 박은숙 기자
문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젊음을 공무원시험에 ‘올인’하고서도 그저 현실도피에 만족하는 공시생들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한 공무원종합학원 관계자는 “10명 중 3명만 진짜 공부를 하는 애들이라 보면 된다. 걔네들은 눈빛, 걸음걸이부터가 다르다. 항상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잠깐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다. 그런 학생들은 길어야 1년이면 시험에 합격해 노량진을 떠난다”며 “반면 공시생이란 벼슬 아래 놀고먹는 애들도 많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쉬는 시간만 기다리니 어찌 그 좁은 합격문을 통과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 노량진을 찾아보니 학원관계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노량진역을 중심으로 학원가가 즐비한 대로에서 마주친 공시생들은 잔뜩 책을 움켜쥔 채 바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한 골목만 들어가더라도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PC방, 당구장, 노래방, 술집, 만화방 등 온갖 유흥시설이 넘쳐났는데 점심시간을 맞아 그곳을 찾는 공시생들도 엄청났다.
또 다른 학원 관계자는 “뒷골목에서 몇 번 마주친 학생들은 절대 시험에 못 붙더라. 걔네들은 영혼 없는 좀비와 같다.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몸만 움직일 뿐 쉬는 시간만 기다린다. 그러다 몇 번 시험에 떨어지면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결국 극단적인 방법까지 택할 때가 있는데 지켜보는 입장에선 답답할 마음뿐이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노량진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어느 곳보다 깜깜하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