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당시 김영완씨의 돈 가방을 전달받은 제3의 인물이 누구인가 하는 점은 초미의 관심사. 아직까지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김씨와 DJ(김대중)정권 실세들의 ‘내밀한 관계’를 밝혀낼 수 있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정황상 현재 검찰 주변에서 문제의 ‘제3 인물’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한 명은 김대중 정부 때 요직을 두루 거친 A씨. 운전기사 김씨의 진술을 토대로 <일요신문>이 확인한 결과 A씨는 가방이 전달된 지난 2000년 10월 당시 H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김영완씨의 검정색 가방에 과연 돈이 들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도 그 돈이 A씨에게 직접 전달됐는지는 김영완씨의 진술이 없는 한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김영완씨가 DJ정권 실세 가운데 박지원·권노갑씨와만 ‘돈 거래’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던 게 사실. 이런 점에서 운전기사 김씨의 ‘돈 가방’ 진술과 그 전달 대상인물을 찾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자가 확인한 운전기사 김씨의 검찰 진술을 토대로 이번 사건의 미스터리를 쫓아가 봤다.
김영완씨는 운전기사를 4∼5명이나 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김영완씨의 사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검찰의 현대 비자금 수사 과정에서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이 중 김아무개씨는 지난 90년 중반부터 약 7년간 기사 일을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김영완씨의 집안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진술에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다.
김씨는 지난 2000년 10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에 김영완씨의 ‘운전당번’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그날 11시경 김영완씨로부터 “외출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승용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뒤 김영완씨가 현관을 통해 현금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검정색 가방을 들고 나와 김씨가 가방을 받아 트렁크에 싣고 운전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김영완씨의 지시에 따라 서울 중구 명동 소재 롯데백화점에 가서 약 20분간 대기하다가 다시 종로의 H아파트로 가자는 지시를 받고 그곳에 도착했다. 그 뒤 김영완씨는 김씨에게 “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트렁크에 실려 있던, 현금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검정색 가방을 들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약 20분 후에 빈손으로 나와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귀가했다는 것이다.
운전기사 김씨는 ‘검정색 가방에 왜 현금이 들어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당시 운전기사들은 김영완 회장이 여행용 가방에 현금을 넣어서 수시로 어디론가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씨의 보다 구체적인 진술 내용은 이렇다.
“나를 비롯한 운전기사들은 2000년 3∼4월경과 같은 해 8∼9월경 두 차례에 걸쳐서 김영완 회장의 지시를 받아 강남구 압구정동 한양1차 아파트 단지 뒷길에서 정체불명의 사람들로부터 현금이 담겨있는 박스를 받아 김영완 회장의 집 안방과 지하 홈바에 옮겨 주었던 적이 있다. 김영완 회장은 이 돈을 가지고 나가곤 했다. 당시에는 그러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김영완 회장이 현금이 든 것으로 보이는 검정색 가방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현금을 누군가에게 가져다주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지난 10월6일 국회 법사위 대검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한 박지원씨(왼쪽)와 권노갑씨. 이들 외에도 또다른 당시 실세가 비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 ||
만약 김씨의 이런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 돈은 어떤 돈이며 그것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먼저 돈의 정체를 살펴보자.
지금까지 김영완씨의 자술서와 운전기사들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이 돈은 권노갑씨가 현대로부터 받았다는 2백억원이 아닐 수도 있다. 돈을 전달한 시기가 다르기 때문. 김영완씨는 현대로부터 받은 2백억원 중 1백50억원을 15대 총선 직전인 2000년 4월11일까지 수차례에 걸쳐 권노갑씨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런데 운전기사 김씨는 ‘돈가방’을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10월 하순경 ‘성명불상자’에게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이 돈은 권노갑씨가 받은 현대의 돈이 아니라 제3의 기업에게서 받은 또 다른 비자금일 가능성도 있다. 지난 9월 김영완씨의 운전기사 두 명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자신들이 김씨의 지시에 따라 서울 압구정동에서 제3의 인물들에게서 현금 박스 56개(1백억원가량)를 받아 김씨 집으로 날랐다고 진술했었다. 이는 김영완씨가 현대가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현대 비자금을 받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돈을 받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만약 그 돈이 권노갑씨의 1백50억원이라고 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김영완씨의 또 다른 운전기사들이 <중앙일보>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김씨가 상자에 담아온 돈을 검은 가방에 나눠 담아 서울 △△△ 근처 아파트 등 이곳저곳에 전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영완씨가 권노갑씨의 1백50억원 중 일부 또는 상당액을 권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김씨는 자술서에서 1백50억원을 모두 권씨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운전기사 김씨의 진술을 토대로 유추해 보면 김영완씨가 권노갑씨 외에도 다른 인물들에게도 돈을 주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면 김영완씨가 지난 2000년 10월 하순경 찾아갔던 H아파트에는 어떤 ‘유력인사’들이 살고 있었을까. 당시 H아파트에는 청와대 간부와 경찰 고위직, 법조계 인사 등 몇몇 인물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중에서도 A씨는 DJ의 핵심측근으로 당시 실세로 통하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운전기사 김씨가 진술서에서 진술한 곳과 A씨의 아파트 동이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 김씨는 김영완씨가 검정색 가방을 가지고 들어간 곳이 이 아파트의 105동 부근이라고 했다.
▲ 서울 평창동에 있는 김영완씨의 집. 현재 김씨는 해외 체류중이다. | ||
“그분은 99년 12월경에 전세로 입주해 지난 2002년 초여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두 내외분이 함께 살았다. 일요일에는 아침마다 두 내외가 등산을 가곤 했다. 한번씩 A씨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돌려보낸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A씨를 방문할 경우 알 도리가 없다”고 밝혔다. 또한 박씨는 “그 일대에서 A씨보다 더 높은 고위직은 살지 않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A씨는 오랫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해온 인물이다. 또한 김영완씨의 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A씨는 지난 11월 하순 미국으로 출국한 상태다. A씨측은 “현재 A씨가 해외에 나가 있는데 12월 초쯤에 귀국할 것이다. 다른 일에 대해선 잘 모른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돈 전달 대상자가 조아무개씨(사망·인사동 고화서상)라는 주장도 있다. 조씨는 김영완씨 지시로 박지원씨에게 돈 심부름을 했던 인물. 하지만 김씨가 아랫사람이던 조씨에게 ‘은밀하게’ 돈을 전달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과연 김영완씨의 돈이 전달된 제3의 인물은 A씨일까. 만약 그렇다면 A씨는 왜 김씨로부터 거액을 받은 것일까. 이런 의문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씨가 현재 해외에 체류중이기 때문.
기자는 김씨의 입장을 듣기 위해 미국에 있는 그의 변호사 브로켓씨와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브로켓씨는 먼저 ‘전화를 하는 사람이 누구냐’며 물었다. ‘한국의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 그는 “아무 것도 말할 게 없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브로켓씨는 현재 김영완씨의 미국 변호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의 페이퍼 컴퍼니로 알려졌던 브래드게이트 한국지점의 대표이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잠행중’인 김영완씨의 사전 언질이 있었던 듯 브로켓씨는 기자의 계속되는 질문에도 일체의 코멘트를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