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친구를 찾아들어갔는데, 자기 딸에게 고함을 치며 매질을 하는 그 집 아저씨와 손을 부비며 잘못했다고 비는 어린 딸이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얼른 나와 버렸지만 그것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영상이 되었다.
그 아이는 언제 맞았느냐는 듯 언제나 싹싹하고 말이 많았지만 우리의 놀이 친구는 되지 못했다. 우리보다 서너 살 어리다는 이유보다는 그 아버지가 친구와 노는 걸 싫어하시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 아이는 청소를 하거나 밥을 했고, 잠깐 우리와 놀다가도 장사하다 돌아오는 아버지가 나타나면 무엇에 놀란 듯 얼른 자기 집으로 숨어들어가곤 했다. 친구들은 그 아이가 늘 아버지에게 맞는다며 불쌍하다고 했지만 왜 맞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가끔씩 나는 한 동네에 살았던 그녀의 소식을 듣는다. 지금은 40대인 그녀의 삶은 여전히 소란하다. 그녀에 대해 좋은 얘기가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늘 때리기만 했던 자기 아버지를 어떻게 느낄까.
아이들은 무죄다. 어떠한 아이도 맞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어른의 분노, 부모의 분노의 쓰레기통이 되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 왜 자기 울타리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을 빌게 하는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부모 목소리가 높으면 아이들은 두렵다. 아이들이 빌게 하는 건 그 두려움을 키워주는 것이다. 두려워서 비는 일이 일상적인 아이들이 어떻게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자기감정을 표현하겠는가.
아이들이 기가 죽고, 눈치만 늘고, 명령과 큰소리만 반응하다 마침내 모멸감도 배우지 못하는 하인이 되고 하녀가 되는 것은 모두 어른들의 책임이다.
계모에게 상습적으로 폭행당해 숨진 울산 어린이의 사연을 읽으며 나는 궁금했다. 세상에, 그 아버지는 뭐 했을까. 무엇으로도 변명이 안 된다. 내 아이를 살해한 이를 살인죄로 처벌해달라고, 아이 아빠를 공범으로 처벌해 달라고, 그리고 자기도 죄인이니 처벌해 달라는 아이 엄마의 피켓을 잊을 수 없다.
세상엔 좋은 계모도 많다. 그리고 자격이 없는 부모도 많다. 이제 우리 모두 아동 학대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의 분노를 어쩌지 못해 아이를 자기 분노의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놓고 ‘훈육’이라고 믿는 한심한 어른들에게서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무죄인 아이들이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부모의 학대로 인해 누구도 믿지 못하다가 또 가까운 누군가를 학대하는 어른이 되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감금과 회초리가 아니라 관심과 공감과 배려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