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5일 오전 4시 20분쯤. 김인원 일경의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 전 염증 수치 상승과 혈압 저하로 이미 몇 차례 약물투여 등 치료를 받은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심상치 않았다. 뜨거웠던 심장은 점차 맥박을 잃어가고 있었다. 끝내 심폐소생술이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에 아버지 김정평 씨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향년 37세. 김 일경의 시간은 1996년 20세 그때로 멈춰있었다.
이성한 경찰청장이 지난 15일 17년 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광주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숨진 김인원 일경의 장례식장에 참석해 조의를 표했다. 연합뉴스
경찰은 시위를 저지하고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전·의경 병력 1800여 명을 투입했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화염병과 돌이 난무하고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최전선에 김인원 일경(당시 20세)도 투입되어 있었다. 입대한 지 6개월 된 김 일경은 방패를 들고 땀범벅이 된 채 두려운 마음을 애써 이겨내고 있었다.
당시 전·의경들은 매일 이어지는 시위에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있었다. 그때 후미를 지키던 기동9중대 의경 30여 명이 사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 대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쇠파이프와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했다. 전·의경들은 교내에서 정문 방향으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퍽’. 밀려나는 대원들 틈에 있던 김 일경이 갑자기 고꾸라졌다. 시위대가 투척한 화염병에 왼쪽 발목을 맞은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불길에 놀란 김 일경은 불을 끄려 고개를 숙였다. 시위대의 쇠파이프가 뒤통수를 강타한 건 그때였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김 일경은 시위대 속에 질질 끌려가 또다시 집단 구타를 당했다.
1996년 6월 14일 밤. 김인원 일경의 아버지인 김정평 씨의 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들이 곧 죽을 수도 있다.”
김정평 씨는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광주 조선대학교 병원으로 향했다. 아들은 머리가 삭발된 채 숨을 헐떡거리고 한 곳을 응시하며 누워있었다. “시위를 막다 저렇게 됐다”는 관계자의 말에 김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심한 장출혈과 뇌출혈 증세. 화염병에 맞은 왼쪽 발목은 큰 화상을 입어 엉덩이 살을 이식해야 할 정도였다.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2차례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7차례나 수술을 시행했지만 의식불명 상태는 여전했다. 김정평 씨는 “둘째 아들의 몸이 오래 누워 있으면서 괴사하는 모습을 보며 괴로웠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며 그날의 괴로운 기억에 눈물을 훔쳤다.
김정평 씨에게 둘째 아들은 애틋한 아들이었다. “아들이 셋 있는데 세 놈 중 가장 온순하고 자랄 때도 여성스러워 가장 정감이 가는 아들이었다”고 한다. 김정평 씨는 온순했던 아들이 늠름해진 모습을 선명히 기억한다.
1996년 1월 8일에 입대한 김인원 일경은 3개월 만에 3박 4일 휴가를 나왔다. 김 일경은 오랜만에 집에서 식사를 하며 아버지에게 환한 웃음을 보여드렸다. 늠름한 아들의 모습에 기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힘든 군 생활에 걱정도 앞섰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며 아들이 그때처럼 다시 한 번 웃어주길 아버지는 가슴 깊이 소망했다. 하지만 1997년 아들은 결국 뇌사 판정을 받고 17년간의 기나긴 투병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김인원 일경의 아버지 김정평 씨가 아들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혹시나 의식이 돌아오진 않을까 뱀장어, 가물치 등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고아 먹였다. 바지락, 홍합, 뱀장어를 삶아 쌀가루와 함께 갈아서 코와 위를 연결한 음식섭취용 관을 통해 넣어주는 식이었다. 김정평 씨는 “투병기간이 길어졌다고 해도 늘 그 가느다란 호스를 통해서 음식물을 마련해서 넣어줬을 것이고 물수건으로 열을 내려주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그래서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때문인지 김 씨 부부는 한 차례도 간병인을 두지 않았다. 대소변조차 못 가리는 의식불명의 아들을 누가 제 자식처럼 간병해 주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여수 집에서 병원까지 오가는 2시간의 긴 시간도 김 씨 부부에게는 긴 시간이 아니었다.
1998년 11월 16일. 김인원 일경은 병상에서 임기 만료로 만기 전역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아버지 김정평 씨는 아들을 생각하며 시를 꾹꾹 눌러 쓰기 시작했다. 그 시가 엮어져 2012년 7월 시집 <노래하는 새들도 목이 타는가>가 출간됐다.
“질풍노도로 달려든 광풍과 천둥 번개 뇌성벽력으로 나의 살점들이 찢겨져 뒹굴던 1996년 6월 14일. 내 눈물강은 홍수로 범람했고 하늘도 무정하여 땅을 치던 그 눈물강이 시방 서서히 메말라 가고 있다.” -김정평 시집 <노래하는 새들도 목이 타는가> 전역 그 후·13 중 김정평 씨는 이 시집을 전남경찰청장에게 보냈다. “아들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에 충실하다 사고를 당한 만큼 국가가 훈장을 안겨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이후 전남경찰청은 2012년 10월 김 씨를 위문하고 십시일반 모은 성금을 전달했다. 정부는 지난 5월 김인원 일경에게 옥조근정 훈장을 수여하는 한편, 지난 경찰의 날에는 그를 명예경찰로 임용하기도 했다. 김정평 씨는 가슴 속 깊이 위로와 감사를 느끼면서도 한켠에서는 허망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아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른 시위대의 신원을 밝히지 못한 아쉬움이 두고두고 컸다.
김인원 일경의 청춘은 그렇게 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술 한 잔 먹고 거나하게 취해보지도 못하고 연애도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아들의 지나간 청춘”이 가장 애통하다고 했다. 아들의 꿈에 대해서 충분한 대화를 나눌 기회도, 아들이 장성하는 모습을 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20세의 꽃다운 나이의 아들은 어느덧 37세가 됐고, 중년의 아버지는 머리가 희끗해졌다.
지난 16일 고 김인원 씨는 유가족의 오열 속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투병 기간만 17년 5개월. 김정평 씨는 “부모와 자식 간의 질긴 인연을 끊는 데 17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며 “17년을 함께 있어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추운 겨울 아들을 떠나보낸 빈자리엔 김정평 씨의 간절한 바람만이 남았다. “우리 아이 같은 사고가 또 발생될까 싶어 가슴 졸이며 산 시간들이었다. 아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희생됐으며, 이 같은 불행은 내 아들에게서 끝나야 한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아이들 방패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전·의경이 각종 시위진압에 투입되면서 한때 희생자가 속출했었다. 전경의 경우 지난 42년 동안 시위진압 등으로 322명이 순직했다. 전경은 지난 9월 25일 마지막 기수가 모두 제대하면서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위 진압 중 순직한 사건으로는 1989년 5월 발생한 부산 동의대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시위 학생들은 사복경찰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다 화염병을 던졌고, 큰 화재로 번지는 바람에 전경 3명 등 경찰관 7명이 사망한 바 있다.
2008년 쇠고기 수입 재협상 요구 시위(왼쪽)와 2011년 한미FTA 반대 시위.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일요신문 DB
경찰청에 따르면 매해 100명 가까운 경찰관이 음주운전 단속 중 다치거나 숨진다고 한다. 그만큼 최근에는 시위보다는 음주운전에 따른 사고가 더 많다는 것. 경찰병원 관계자 역시 “현재 시위로 인해 부상을 당해 입원해 있는 환자는 없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시위로 인한 전·의경들의 부상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의경부모모임 강정숙 회장은 “시위를 막는 전·의경들의 부상이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최근에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특히 심각하다”라고 전했다. 이전에는 죽창과 투석, 화염병 등으로 큰 물리적 부상을 당했다면 최근에는 심리적 부상이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다. 2006년 농민집회 당시 죽창에 허벅지와 옆구리를 관통당한 한 의경은 “치료기간만 1년이 넘게 걸렸다. 공무수행 중 부상으로 국가유공자 자격을 얻긴 했지만 현재까지도 후유증이 남아있다. 이렇게 큰 부상뿐만 아니라 날아오는 너트와 돌 때문에 눈에 부상을 입거나 실명 위험까지 겪는 동료 대원들이 상당히 많았다. 다시 돌아가라면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고 전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의 기억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의경들도 상당했다. 강 회장은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시위를 막던 한 의경은 코리아나 호텔 앞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폭행을 당해 전역을 한 현재까지도 그 당시 트라우마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국가유공자 자격을 얻고 싶어도 정신병원에 한 달간 입원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괜히 정신병원에 보냈다가 상태만 더 악화될까봐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결국 이러한 전·의경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서는 전·의경들을 보는 시선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높다. 강 회장은 “폭력 경찰이라고 보기보다는 전·의경들도 한 가족의 아들이자 소중한 청춘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방패 안에서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 사실을 알고 전·의경을 보는 시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전·의경뿐만 아니라 공무수행 도중 부상을 입어 현재 전국 보훈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도 1746명에 달한다. 이들은 6.25, 4.19, 월남전 고엽제 등으로 부상을 당해 지금까지 장기 입원해 있는 환자들이다. 국내에서 공무수행을 하다 사고를 당해 입원한 공무원들도 388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